13-2. 레드오션에서 벌어지는 “쩐의 전쟁” – 글쓴이 이야기 (2)
(앞 편에 이어)
4) 추가 지체상금 문제
딴 건설사가 시공하다가 망해서 공사중단되고 건설공제조합이 재발주한 현장. ‘보증시공’ 현장.
그 중에서 가장 수익성이 나쁜 소위 ‘악성현장’. 이전 건설사와 계약했던 하청업체가 현장점거하고 포크레인으로 사무실 때려부수는 바람에 15억원 주고 합의해야 했던 현장.
그 현장 소식, 한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대략 1년이 흘러 2011년 여름이 될 때까지, 저는 본사에서 바쁘게 살며 악성현장의 기억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장 소식을 다시 들었습니다. [공사가 3개월 더 늦어져서 지체상금 40억원이 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지체상금.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크리티컬입니다. 공사 하루 늦어지면 0.1% ~ 0.3%의 지체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수익률 1~2%짜리 현장에서는 열흘만 늦어져도 바로 적자 납니다. 한두 달 늦어지면 수익률 좋은 현장도 박살납니다.
거기에 더해, 문제의 현장은 이미 앞 건설사가 6개월 공사지체하면서 지체상금 80억원 발생시킨 상황이었습니다. LH 입장에서는 이미 -80억원 공제하고 나머지만 공사비 준다고 결정되어 있었죠.
다만, 이 ‘앞 건설사 80억원’은 공사 받아오는 쪽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B건설이 수주할 당시부터 확정되어 있던 문제였고, 보증시공 발주자인 건설공제조합도 잘 아는 문제였습니다.
수주 당시, 건설공제조합은 ‘추가공사비’ 명목으로 75억원을 더 줬습니다. 명목은 추가공사비였지만 저 지체상금으로 감액된 돈을 메꿔 준 거였죠. 즉, 앞 건설사가 6개월 공사지체에 80억 지체상금 물리는 건 확정된 사실이었고, 그 상태로 공사완성하는 게 최대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하청업체 현장점거 및 그 후속 잡다한 문제에 얽히면서, 결국 B건설도 3개월 공사지체를 하고 말았습니다. 앞 건설사 지체까지 합치면 총 9개월에 120억, B건설 책임분만 따지면 3개월에 40억. 그 큰 돈을 공사대금에서 공제당하게 되었습니다.
공사 9개월 늦어진 건 확정적인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죠. 지체상금 좀 줄이긴 해야 합니다. 공제당한 금액 중 일부라도 받아낼 수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 일이 저에게 맡겨졌습니다. ‘작년에 니가 현장 가 봤으니 대충 사정 알지 않냐. 지체상금 좀 깎아야 하는데 사건 맡아서 잘 해봐라.’는 식으로 법무팀 막내가 이 일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뭐, 법리적으로는 간단합니다. 지체상금도 결국 ‘손해배상 예정’이고, 손배예정이 과다하면 법원이 제반 사정 고려하여 직권으로 감액할 수 있습니다. 민법 398조 1항인가 그런데, 그 조항 하나 믿고 ‘살려줍쇼 굽신굽신’ 시전하면 끝나는 문제였습니다.
또한, LH도 제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B건설을 상당히 배려해 줬습니다. ‘일단 서류상 지체상금 공제하도록 되어 있으니 40억 공제하긴 하는데, 나중에 소송이든 중재든 결정 받아 와서 일부 깎으면 깎은 금액만큼은 줄게.’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LH는 ‘중재도 받아 주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은 책임문제 때문에 3심까지 가는 소송을 선호하고 중재는 거부했었는데, 그걸 바꿔 ‘이 건은 중재 오케이.’라고 한 거죠. 이 정도면 LH입장에서는 정말 많이 양보한 겁니다.
즉, (앞 건설사가 발생시킨 6개월 80억 지체상금은 잊어버리고) B건설이 새로 발생시킨 3개월 40억 지체상금만 중재신청해서 결정 나오는 대로 일부 받아오면 됩니다. 중재 과정에서의 논리는 ‘우리 다 죽습니다 조금만 양보해서 절반만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살려줍쇼 굽신굽신’. 이것만 하면 됩니다. 참 쉽죠?
쉬웠습니다. 주어진 대로만 하면 쉬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꼭 쉬운 길로 가야 할까요? 뭔가 다른 길 없을까요? 대단히 어렵고 험난해 보이지만 잘 되면 대박나는 길, 그런 길 없을까요?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레드오션에서 칠흑 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블랙기업이 시전할 만한 (양아치스러운) 주장, 뭐 그런 거 없을까요?
2010년 8월에는 무기력했던 늦깍이 중고신입. 1년 지난 상태에서, 그 중고신입이 잔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블랙기업 회사원에 맞게 (양아치스러운) 사고 회로를 작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청구액을 120억원으로 올린다!’는 양아치 짓. 그걸 시작했습니다.
5) 공룡 상대로 전쟁 준비
앞 건설사가 6개월 공사지체하면서 80억원 지체상금 발생. 후속 보증시공 건설사가 3개월 추가 지체하면서 40억원 지체상금 발생.
후속 B건설사는 자기 지체상금 40억에 대해서만 청구하는 게 맞습니다. 특히, 보증시공 과정에서 건설공제조합이 ‘추가공사비 명목’으로 75억원을 더 줬고 B건설사가 그걸 잘 받았다면, 앞 80억원은 포기하는 게 맞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현실적인 자금흐름 말고) 계약서 문구만 따로 분리해서 따져봐도 과연 그럴까요?
공제조합은 ‘지체상금 보상비’를 준 게 아닙니다. 공사중단된 현장을 다시 공사재개하는 데에 75억원 정도 필요하다고 대충 계산해서 ‘추가공사비’를 줬을 뿐, 지체상금에 대해 보상한 건 (서류상) 없습니다.
또한, 이 공제조합-B건설사 간 공사비 결정 문제는 ‘내부사정’입니다. 대외적으로 원발주자인 LH와 무관합니다. LH는 앞 건설사 지체상금 80억원을 모두 공제했을 뿐, 이를 공제조합이 어떤 식으로 떠안았느냐에 대해서는 대외적으로 관여한 바가 없었고 그럴 권한 또한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LH와 공제조합 간의 보증시공약정에는 ‘보증시공사가 앞 건설사의 모든 권리의무를 승계하며, 앞 건설사 공사의 하자에 대해서도 모두 책임진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보증시공 하는 이유가 앞 건설사 책임까지 다 이관하려고 하는 건데요.
자, 이 둘을 조합하면?
보증시공사 B건설사는 지체상금 보상을 받은 적 없습니다.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그러합니다.
그리고, B건설사는 앞 건설사의 의무뿐만 아니라 ‘권리’도 승계했습니다. 즉, 앞 건설사가 공제당한 지체상금 80억에 대해 ‘너무 과도한 손배예정이니 감액해 주세요 이거 조금이라도 안 주면 저희 다 죽습니다 살려줍쇼 굽신굽신!’를 시전할 권리(?)도 같이 승계했다는 얘깁니다.
서류상으로는 앞 건설사 지체상금 80억을 합쳐서 청구할 수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그러합니다.
사회생활 경력 3년 안 되는 얼치기 대리. 2011년의 저는 이 논리로 청구금액을 뻥튀기했습니다. LH는 40억 청구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주 당당하게 120억원 지체상금의 감액을 청구하는 중재신청서를 들이밀었습니다. 정말 당당하게 들이밀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6) 공룡이 빡치다
40억 기준으로 중재 진행하기로 구두합의했는데 갑자기 120억 기준으로 중재신청 들어온 상황. 이 상황에서, 국내 최대 최강 공기업 LH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중견건설사 얼치기 법무담당 대리 하나가 오버질했는데 어떻게 대응할까요?
뭐 뻔합니다. (속어 좀 쓰겠습니다.) 좆됐습니다. 아주 그냥 ‘마션’의 마크 와트니가 화성에 혼자 버려진 것과 맞먹을 만큼 좆됐습니다. I’m totally fucked 그 잡채였습니다.
2010년에도 그러했지만, 2011년의 저는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몰랐고 여전히 경험부족이었습니다. 거대공룡 LH를 상대로 구두협의에 없던 주장을 하면서 청구금액을 올린다는 게 미친짓이라는 걸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LH 임직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공기업 특성상 다들 편하게 일할 뿐, LH 입사하기 전까지는 나름 난다긴다 하는 엘리트들입니다.
그리고, LH는 매우 정교한 업무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기록합니다. 즉,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게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 더해, LH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지원부서의 협조를 거쳐야 합니다. 특히, 소송에 갈음하여 진행되는 중재사건이고 그 가액이 40억~120억 수준이라면 당연히 법무팀 협조 거쳐야 하고, 대표이사(사장) 최종결재 나야 합니다.
블랙기업 얼치기 대리가 알고 있는 사실관계와 법리 정도는 LH법무팀 입장에서 반나절이면 간파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건설공제조합이 보증시공 자금관리 어떻게 했는지 빤히 다 알고 있고, 현장에서 40억 지체상금으로 협의한 회의록 다 갖고 있습니다. 사실확인 금방 하죠.
LH 법무팀의 결론은… 중재 불가(不可).
중재 피신청인으로서 이의제기하여 중재 거부하고 소송하면 그 소송에서 B건설 측의 주장을 논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심에서 최소 1년 이상, 2심에서도 4개월 이상, 3심까지 가더라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혀 최종 결론을 얻겠다는 게 LH의 입장이었습니다.
LH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B건설 내부에서도 이걸 해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큰 일을 겪고 있었는데요. 바로 ‘첫째 아이가 태어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기쁜 일이죠. 아내보다 저를 더 많이 닮은 (그래서 애한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아무튼) 갓난아기가 있다는 것, 그 아기가 천만다행으로 건강하고 어디 아픈 곳 없다는 것.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 기억되는 순간입니다.
그 기쁜 순간을 누리며 휴가 마치고 돌아왔을 때. ‘LH가 중재 거부하기로 내부결정했다.’는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 거냐?”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머릿속에 떠도는 건 이직(離職) 두 글자 뿐.
그러나, 이직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나이 36살인데 합산경력 3년이 안 되고 거기에 3번째 직장 구하는 상황이라면, 제가 채용하는 입장이라도 서류 광탈시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프로이직러도 한 직장에서 최소 2~3년은 있어 줘야 인정되는데, 너무 자주 옮기면 ‘실력 없어서 떠도는구나.’라고 서류로 입증하는 꼴 밖에 안 되거든요.
막막했습니다. 정말로 막막했습니다. 고시공부로 날려먹고 찌그러진 인생, 여기서 완전히 무너지나 싶었습니다.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 짓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직장상사 분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청구금액을 40억에서 120억으로 뻥튀기한 핵심 주체는 저 본인이 맞지만, 법무팀 막내가 그거 하겠다고 결재 올린 거에 아무 말 없이 싸인한 건 윗분들이죠. 싸인할 때에는 모두 동의, 일 터지니 그냥 관망. 원망스럽긴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윗분들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대외적인 책임은 윗분들이 지겠지만 내부적으로 실무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게 ‘너 혼자 책임지고 회사 나가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은 이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때는 그저 원망스러웠을 뿐.)
그렇게 이틀인가 사흘인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주말이 되었고… 당시 격주 토요일 근무를 하던 B건설에서 ‘토요일 근무 없는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주말 되기 전, 저는 와이프에게 ‘이번 일 크게 꼬였다. 이직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와이프는 아무 말 안 하더군요.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어린 딸을 쳐다볼 뿐.
주말이 암울했습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살던 빌라전세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아서, 더더욱 우울하고 암울했습니다.
그 주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B건설의 회장님”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