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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레드오션 투쟁기 (17)

13-1. 레드오션에서 벌어지는 “쩐의 전쟁” – 글쓴이 이야기 (1)

by 테서스


프롤로그에 썼듯이, 저는 잠깐 동안의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생이 되었다가 영원히 백수로 살 뻔 했습니다. 35살에 B건설로 재입사하긴 했지만, 무늬만 대리였고 사실상 신입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실무경험이 부족했구요.


그래도 열심히 살긴 했습니다. 남들보다 7~8년 늦은 상태였고, 저축은 하나도 없었으며, 당장 받는 월급도 최저임금보다 더 받는지 따져 봐야 할 정도 수준이었지만… 언젠가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버텨냈습니다.


그 와중에 덜컥 결혼도 해버렸네요^^. 2023년 분위기에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일단 결혼부터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니 더더욱 열심히 살게 되더군요. 최소한 내 자식에게 ‘중산층의 삶’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에 더욱 더 아끼고 모으게 되더군요.

그리고, 회사 일도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좋든 싫든 시키는 일은 다 했고, 생전 처음 하는 일도 군소리 없이 다 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실수도 많았지만 그건 최대한 찾아보고 메꾸면서 만회해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저도 모르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 자신의 상품가치를 바꿀 기회

레드오션 시장의 블랙기업. 이 글의 초안이 된 ‘자기계발서’를 쓰고 있을 때, 저 자신이 노동시장의 상품으로서 더 잘 팔리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회사가 잘 되는 길인 동시에 저 자신이 잘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첫 시작은 ‘보증시공 현장’이었습니다.



1) ‘보증시공’의 시작


보증시공. 건설법무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이게 뭥미?”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많을 것 같은 단어입니다. 2010년대 초반에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진 업무거든요.


뭐 별 건 아닙니다. 건설사가 공사를 할 때 ‘계약이행보증증권’을 제출하는데, 그 보증증권사인 건설공제조합이 “이행보증 10% 현금보상하느니 차라리 다른 건설사에게 공사 맡겨서 준공시켜 버리자!”라고 생각하면서 나온 반짝 틈새시장이었습니다. 2008년 말 금융위기 이후 진짜 잠깐 동안만 존재했던 공사형태였죠.


이 때 당시 건설공제조합이 발주하던 건물은 ‘짓다 만 건물’이었습니다. 시공사가 공사 다 끝내지 못하고 무너져서 공사중단된 건물들을 인수해 후속 공사 다 하는 것. 이게 보증시공의 핵심이었습니다.


물론, 각 건물마다 사정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건물은 시공사가 좀 빨리 망하면서 공사비 대부분이 남아 있기도 했고, 또 어떤 건물은 공정률이 70%를 넘어가면서 철콘 골조는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대산 잔여 공사비가 얼마 없었습니다.

당연히 ‘공사 많이 남은 건물’이 더 좋았죠. 현장정리만 하고 나면 사실상 새로 짓는 것과 다름없는 건물을 보증시공으로 넘겨받으면 상당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건설공제조합 또한 건설업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입니다. 수익성 좋은 현장만 넘겼다가는 수익성 나쁜 현장에서 피 볼 수 있으니, 이걸 적절히 섞어서 넘겨야 했습니다.


그 결과, ‘묶음발주’가 나왔습니다. 수익성 좋은 현장 + 안 좋은 현장 섞어서 4~5개 단위로 발주하는 방식. 보증시공은 이러한 묶음발주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B건설은 LH 아파트 현장 4개를 묶음으로 수주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LH공사. [공사 따내면 서서히 망하고, 안 따내면 바로 망한다]라고 불리며 엄청난 경쟁으로 저가수주하게 되는 공사. 그 공사를 ‘보증시공’으로 수주했습니다.


보증시공 4개 현장 중 2개는 괜찮았고, 1개는 적자 예상. 그리고 마지막 1개가 최대 문제였는데요.


가장 크게 문제되는 1개 현장은 이미 초대형 적자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공사준공예정일 대비 6개월 지연되어 지체상금 80억원을 공제당할 상황이었고, 준공기일을 맞추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장 크게 문제되는 현장’은 이전 건설사 밑에서 일하던 하청업체와 그 소속 근로자들이 돈을 받지 못해 [현장점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치권 행사요건 따위는 아몰랑. 무조건 현장점거하고 실력행사. 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B건설은 이 4개 묶음발주를 덜컥 받아들였습니다. 저 문제 현장 1개만 해결하면 나머지 현장 3개에서 조금은 남길 수 있었거든요. B건설 특유의 쥐어짜기 신공 더해지면 더 많이 남길 것 같았거든요.


그리하여, ‘보증시공’이 시작되었습니다. 금융위기 여파가 본격화되며 건설사들이 픽픽 쓰러지던 시절, ‘남이 짓다가 토해낸 건물’을 승계받아 추가 시공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문제가 터졌죠. 하청업체와 소속 근로자들에게 점거당한 현장, 그 곳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2) 점거당한 현장에 법무 막내 투입


B건설 입사 3개월째. 전체 사회생활 경력 2년 안 되는 막내 중고신입.

그런 제가, 어느 날 부사장님 방에 불려갔습니다. 당시 부사장님이 저 보증시공 현황을 ‘아주 짧게’ 설명해 주시고 얘기하시더군요.


“거기 현장 사무실 박살났단다. 법무팀에서 한 명 내려와 달라고 하니까 니가 내려가 봐라. 돈은 15억까지 줄 수 있는 걸로 회장님 보고드렸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돈으로 해결해. 돈 깎으면 더 좋고.”


처음에는 ‘사무실 박살났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불법/합법 따지지 않고 유치권 행사요건과 적법성 여부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현장점거하는 상황, 이런 상황도 당연히 처음이었습니다. 그 이전 동부그룹에서 신입사원 1년 9개월 한 걸로는 이런 상황을 커버할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 상황이잖아요. 내려가야죠.



그해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운전면허 없고 차량도 없는 35살 늦깍이 중고신입은 땀 뻘뻘 흘리면서 남쪽 신도시 개발현장까지 찾아갔습니다. 건설회사 법무팀 생활 한 이래 처음으로 ‘현장사무실’이라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오 마이 갓.


현장사무실이 박살나 있었습니다. 흔히 ‘가건물’이라고 하는 아시바+함석철판 조합 건물이 무슨 종이박스 찌그러지듯 우그러져 있었습니다.

밤 9시쯤에 포크레인 끌고 와서 현장사무실 천장을 눌러 버렸다고 하더군요. 안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다 있는 상황에서요.


그 때 처음 든 생각은… ‘와 C발 이거 살인미수 아냐?’



법리적으로 따지면 살인미수 맞습니다. 중장비로 가설건축물 찍어눌러서 2층 천장이 1층 천장에 닿을 만큼 찌그러뜨렸는데 안에 사람 있는 걸 뻔히 알면서 했다면, ‘도망 안 가는 새끼 그냥 같이 죽여도 돼!’라는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될 겁니다. 충분히 인정될 겁니다.


[지역 건설사 중에 조폭 출신이 많다]라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와 C발 사람 안에 있는데 중장비로 건물 뽀갤 정도면 진짜 조폭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쎄게 나올 거면 진짜 밤에 사시미 들고 와서 쑤시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뭐 제가 응용력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현장사무실 박살난 거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장면. 물론 영화처럼 진또배기 사시미 칼빵은 없지만 최소한 현장사무실 우그러진 것만큼은 영화 셋트장 이상으로 실감나는 장면.

그 현실 앞에서, 35살 늦깍이 중고신입은 잔뜩 쫄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저는 갈 데가 없었습니다. 35살에 일자리 다시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 현장에서 도망가 봐야 백수로 인생 마감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장 사람들도 큰 위기의식 없이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엄청 놀라웠는데, 역시 노가다판 짬밥은 다르더군요. 어젯밤 현장사무실이 우그러지는 사고(!)를 겪었는데도 다음날 되니 다들 일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은 현장에 합류했습니다. 뭐 대단한 해결방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기도 했었구요. ‘제가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같은 헛소리도 했습니다.



해결방안. 있을까요?


뭐, 인근 조폭 아저씨가 팔에 잉어문신 보여 주면서 ‘1억에 다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건 저 앞 어딘가에서 썼습니다. 현장소장님이 거부하셔서 그렇게는 안 했지만 아무튼 그건 패스.


그럼 경찰? 명백히 불법적인 현장점거고 거의 살인미수 급 특수손괴행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도와 주지 않을까요?


경찰에 신고하고 고소장도 제출했습니다만… 경찰의 답변은 [민사로 해결해라]였습니다.


지금 정도면 그 답변 예상하고서 경찰 쪽은 적당히 신고만 걸어 뒀겠지만, 그 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C발 대한민국 이렇게 후진 나라였어? 살인미수로 사람이 죽을 뻔 했는데 민사로 해결해? 다 죽고 사망위자료 청구하라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물론 그 말 못하긴 했지만.


건설현장 미수금 문제로 현장점거 대결 맞붙었을 때, 경찰은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민법상 유치권 요건을 판단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죠. 진짜 현장에서 칼부림 나지 않는 한 경찰이 개입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뭘 해야 할까요? 공사방해행위에 대해 방해행위중단 및 현장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해서 결정 받아내고 그 결정에 의거해서 집행관에게 집행신청하고 집행관과 계약한 용역업체를 불러와서 현장 주위를 용역직원으로 삥 둘러 막을까요?


저 가처분 및 집행에 몇 달 걸립니다. 이미 지체상금 발생하는 현장에 그냥 앉아서 몇 달 더 까먹는 겁니다.


결국 돈 주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체상금 때려맞느니 일부라도 돈 주고 빨리 현장 넘겨받는 게 최선입니다. 문명국가의 법제도와 경찰권력에 의지할 시간에 돈으로 해결하는 게 훨씬 더 빠릅니다. 애당초 각 기업들이 누리는 ‘이윤’이라는 게 그런 ‘돈으로 해결하는 위험요소’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구요.



지금 2023년의 저는 이 대답을 10분 안에 할 수 있습니다만… 2010년 8월의 늦깍이 중고신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괜히 미적거리기만 했었죠. 접수도 못할 가처분신청서 쓰고 경찰한테 씹히는 신고서 쓰면서 시간만 끌었습니다.


그 때는 그러했습니다. 그 때는.



3) 일단은 패배.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가처분 준비하고, 화내고, 우울해 하고, 조폭 문신도 구경해 보고. 해당 현장에 열흘 있었습니다. 답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해 볼려고 현장 사람들과 함께 하긴 했습니다.


뭐, 결국은 돈 주고 해결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 쪽에 연락해 (당시 정부와 연줄 있다고 알려져 있던) 변호사님을 섭외했고, 그 변호사님 쪽에서 15억원 꽉꽉 채워 합의했습니다. 현장 불법점거했던 하청업체는 15억원 입금받고 물러났구요.


열흘 뒤 서울 올라오자, 당시 부사장님께서 무척 실망하신 모습이더군요. “15억원 상한으로 회장님 허락 받긴 했지만 조금은 깎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더냐.” 라는 말은 보너스(?).


이 싸움, 명백하게 제가 패배했습니다. 처음부터 경찰신고 / 가처분으로 해결되는 건이 아니었고, 최소 2일째에는 상대방 사장을 만나 협상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변호사 끼지 말고 맞다이 협상해서 우리 의지를 보여 주고 금액 깎았어야 했습니다.


그 때는 무서워서 못 했죠. 일단 현장사무실 찌그러진 걸 봤을 때부터 쫄았었고, 이런 협상을 한 번도 안 해 봐서 두려웠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나 싶었는데 바로 1패. 2010년 8월에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명언이 있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It is not over till it’s over.


보증시공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늦깍이 중고신입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싸움. 그건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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