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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레드오션 투쟁기 (15)

11-2. 레드오션 제3계명 인사관리전략 – 진흙 속 도자기 (하)

by 테서스

레드오션 인사관리 : 끝없이 진흙 속을 뒤지고, 그 진흙을 도자기로 바꾸는 작업 – (하)


4) 후광효과는 반드시 배제하라


인사관리에서는 “후광효과(Halo Effect)”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제 능력을 보지 않고 학벌/외모/경력/과거 실적 등의 다른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날 거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글쓴이 본인이 인사관리 경험을 해 본 건 아니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 그냥 주워들은 풍월로 받아들이시면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레드오션 시장의 회사들도 소위 ‘능력자’를 뽑는다. 그 숫자를 적절히 조절해서 몇 명만 뽑긴 하지만,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중요한 일을 해결하고 조기진급해 임원 되려는 ‘승진추구형 인간’을 뽑긴 뽑는다.


다만… 이러한 ‘승진추구형 인간 선발정책’이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후광효과에 속아 잘못 뽑은 인재는 여러모로 큰 부담이 된다. 그리고, 상당수 중견~중소기업들이 이 후광효과에 자주 속는다.


레드오션 시장에서 빡빡 기고 있는 회사들 – 흔히 말하는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가장 자주 일어나는 후광효과 오류는, 대기업 출신과 명문대 출신에 대한 착각이다. 중견~중소기업에서 잘 볼 수 없는 유형이고, 더 큰 기업에서 이것저것 경험했거나 / 어릴 때부터 공부 잘했던 게 증명되었기 때문에, “뭔가 있을 것이다”라는 착각이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대학교수 같은 초 엘리트들도 막상 비리 터지고 언론에 까발려지고 나면 우리와 별 차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대기업 출신이나 명문대 출신들도 별 거 없다. 진짜 별 거 없다.

약간 이해력이 빠르거나 기억력이 조금 더 좋거나 보고서를 쓸 때 맞춤법을 잘 맞추거나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능력에서는 결국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작은 차이들을 조합해서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해서 큰 상승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열정과 자질이 추가로 없는 이상, 대기업을 다녔다거나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것만으로는 말 그대로 “별 거 아니다”.


게다가, 누차 강조하다시피 우리가 종사하는 이 핏물의 레드오션은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한 산업’이다. 건설업만 봐도 70년 간 쌓여 온 온갖 노하우들이 법제도로 완비되어 있고 국가에서 표준계약을 장려하고 있으며 어지간한 분쟁의 틀은 이미 다 정립되어 있다. 하버드 MBA를 수석졸업한 인재가 온다고 해서 이 틀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만화 원작으로 큰 히트를 쳐서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비트”(내가 알기로는 고소영이 여자주인공으로 나와서 흥행에 성공한 유일한 작품이다)에서, 여주인공 로미가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서 폭주하는 속도에 벌벌 떨다가 하는 대사가 있다.


“기계의 성능과 너 자신의 성능을 착각하지 마. 찌질해 보여.”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부모를 가지고서 자랑하고 다니는 인간들이 꽤 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을 따라하려고 무리한 빚을 내서 자동차나 집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찬양해 주는 사람들도 꽤 많다. 뭐, 자기 인생이니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고, 제 멋에 사는 거니까 자랑하고 싶으면 자랑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대기업을 다녀 봤다”, “좋은 대학을 다녀 봤다”는 자부심만 가지고 별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를 떠는 거라면, 그런 사람은 회사에 들이면 안 된다. 특히, 한계상황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레드오션 기업이라면 더더욱 이런 사람을 배척해야 한다.


대기업과 우수대학 출신들 중에 유능한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무능하면서 콧대만 높고 많은 연봉만 요구하며 주위 사람들과의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은 회사에 “독”이 될 뿐이다.

단순히 그 개인의 연봉 몇억원만 손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몇십억~몇백억의 추가손해를 입고 성실하게 살던 기존 회사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회사에 큰 내상(內傷)을 남길 가능성이 큰 것이다.



장황하게 썰 풀긴 했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내가 다니던 B건설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앞에서 잠시 말했듯이, 내가 백수 고시생을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한 번 직장인으로 돌아온 건 35살 때였다. 내가 입사하고 한 달쯤 지나서, 건설업 5대 메이저에 들어가는 회사 출신 분이 경력직 부장 직급으로 입사했다. 그 이름도 당당하게 “해외영업 총괄 담당”이라는 멋진 초 엘리트의 직함을 달고서.


직함과 출신 회사를 보면, 해외를 주름잡으며 굵직한 국제 계약을 몇 건씩 가뿐하게 처리하고 외국 바이어들을 쥐락펴락할 만한 능력자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본인도 자신감이 넘쳐서, 당시 도급순위 43위였던 회사의 회식 자리에서 “이 회사를 20위 권으로 진입시키는 데 일조하겠습니다"라는 호언장담을 했다.


그런데, 일하는 게 좀 이상했다. 나도 경력이 짧아 남의 업무를 평가할 수준은 못 되었지만, 그런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영업이 되겠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는지 안보는지 알 수도 없는 해외 정부의 사이트를 몇 개 띄워 놓고 자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안부 묻고는 “어디 공사 주실 거 없습니까? 허허허” 뭐 이러면서 하루를 보내다가, 퇴근하면 사람들 모아서 술 마시면서 아프리카 갔던 얘기 자랑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분이 인도네시아인가 어딘가 공사를 알아본다면서 자칭 “지역 전문가”와 함께 해당 국가를 몇 번 다녀왔다. 당연히 출장비 등등 해서 회사돈 몇천만원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복사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영문 메일 한 통을 팩스로 받았다. 이 메일은, 사법시험 제출용으로 토익 700점 겨우 넘기고 영어회화는 아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수준의 영어실력을 가진 내가 한번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영어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주요 요지는


<미스터 김(문제의 부장님)의 열정은 높게 평가하지만, 아쉽게도 미스터 김의 영어실력은 본 건 사업을 함께 진행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번에는 통역을 대동하고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5대 메이저 건설사 출신으로 해외영업을 총괄하라고 뽑아 놓은 부장, 43위의 건설사를 20위 권으로 끌어올리겠다던 자신감을 가진 그 분은, 정통 영어문화권이 아니고 기본적인 비즈니스 영어만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에서조차 통하지 않는 영어실력을 가진 분이었다. 생활영어는 가능하겠지만, 비즈니스 영어에 관해서는 사업에 관한 기초 논의도 진행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뒤 결론은 대충 뻔하다.


이 분이 진행하던 사업은 유야무야되었는데, 회사가 어떻게 다른 영업라인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공사를 몇 개 수주하게 되었다. 이 분은 발빠르게 해외지사로 지원해서 파견을 나갔고, 해당 지사에서 “영업현황”이라며 인도네시아 정부 사이트에 공사입찰공고 나온 걸 그대로 번역해서 한 달에 한두 번씩 본사로 보고를 해 왔다. 요즘 시대에는 파파고 번역만 돌려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고, 수주전략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무슨 공사를 어떻게 수주하겠다는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입찰공고만 올리는 게 무슨 뻘짓이냐”라는 질책을 몇 달 동안 들으면서 착실히 월급 받아먹다가, 1년이 넘어 퇴직금을 받을 조건이 되자 어느 새 사직서를 쓰고서는 국내로 돌아와 사라졌다. 입사할 때 별도 연봉계약을 체결하면서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을 거라 짐작하는데, 어림잡아 출장경비와 연봉 합쳐 1억~2억 정도의 돈을 쓰게 만들면서 인도네시아에서 몇 달 놀다가 나간 것이다.



후광효과에 현혹되었을 경우, 회사는 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고연봉을 주고 그 자체만으로 억단위의 손실을 입는다. 게다가, 이 사람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조직 전체의 사기저하로 이어진다. 이 사람이 별볼일 없는 “찌질이”면 사기저하 수준을 넘어 다른 능력 있는 사람들의 반감과 이직을 촉구하게 되며, 장기적으로 회사의 인적 역량 자체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정말 일이 많이 꼬이면 이 사람으로 인해 회사에 큰 위기가 찾아온다. 레드오션에서 싸우는 한계기업들에게는 위기 하나하나가 곧바로 생존의 문제로 직결되는데, 사람 하나로 회사가 휘청거리는 것이다.

비싸게 데려온 사람으로 인해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를 겪지 않으려면, 좋은 경력과 고학벌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욱 더 면밀하게 관찰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대기업 출신, 고학벌 출신을 신나게 깠지만, 사실 나 자신도 이런 후광효과로 취직한 사람이긴 하다.


내가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은 그 때 당시 나름 대한민국 민간 대기업 그룹 중 10위~15위 사이는 되는 곳이었다. 한때는 10대 그룹으로 꼽히기도 했으나 약간 밀려난 수준이었고, 1위 기업인 삼성을 한참 벤치마킹하며 최신 경영기법으로 도배하기 시작하던 곳에서, 신입으로 1년 10개월 동안 일을 배웠었다. 그 곳에 신입으로 입사한 것도 소위 ‘학벌’이 작용했었고.


내가 3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2년도 안 되는 경력을 가지고 나름 규모가 되는 중견 건설회사였던 B건설에 (비록 연봉은 낮지만) 대리 직급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후광효과 때문이었다. 내가 나온 대학의 간판과 신입생활을 한 대기업의 간판이 없었다면, 나는 백수 고시생과 PC방 알바를 왕복하다 50살 전에 죽었을 것이다. 후광효과가 내 인생의 강력한 무기였고 최후에 나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방패였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출발을 좀 더 쉽게 하는 정도의 차이다. 지나온 인생을 보니 조금 더 성실할 가능성이 높고 일반적인 평균 수준보다 조금 더 암기력이나 이해력이 좋을 것 같다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


후광효과 가진 사람에 대한 회사의 판단은 “한 번 기회를 줘 보자”는 수준에서 멈춰야 한다. 회사를 위해 돈을 벌어 오고 주위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진짜 능력”이라는 것은, 시험에서나 통하는 암기력과 얄팍한 성실성 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구별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회사는 미래가 없다.


여기서 여러 독자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능력을 가졌는가?”라고 나에게 질문할 것이다. 후광효과가 아닌 진짜배기 실력을 증명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 판단은 나 자신이 할 수 없다. 내가 선택한 회사가 그것을 판단할 것이며, 내가 선택한 회사에서 보여 준 성과가 그것을 입증할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을 여러분 앞에 보여 주는 이 순간까지는 입증이 되고 있어야 여러분들도 만족하며 이 글을 읽을 것이다.


(* 2010년에는 여기까지만 썼었습니다만… 2023년에는 좀 달라져야겠죠. 제가 B건설에서 했었던 일은 뒤에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5) 끝없이 진흙 속을 뒤져 ‘도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하루종일 땅을 파 봐라 100원 한 푼 나오나.”


뭐, 땅 판다고 돈 나오는 건 아니다. 땅 판다고 보석 찾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보석이 아니라 도자기를 만들려 했거나, 아니면 그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옹기그릇을 만들려 했다면, 진흙만 잘 파도 충분히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다. 루비 원석을 파내려면 인도로 가야 하지만, 백자/청자의 원료인 고령토는 우리 나라에서도 캘 수 있다. 옹기그릇 재료는 뒷산에서도 캘 수 있다.

그리고, 보석만 값어치가 높은 것이 아니다. 장인의 손길을 거쳐 정교하게 잘 만든 도자기는 그 자체로도 비싸게 팔리며, 몇몇 조건에 따라 보석보다도 더 비싼 보물이 될 수 있다. 보석은 음식을 담을 수 없지만 옹기그릇은 장을 담아 몇 년이든 보관하게 해 주고, 전통축제라도 열리면 관광객들에게 좋은 값을 받고 팔 수도 있다.



하나 예를 들어 보자. 앞에서 예로 든 실패한 후광효과와 반대의 경우다.


B건설은 처음부터 건설업으로 시작한 회사가 아니고, 모태회사를 따로 두고 있다. 그 모태회사는 물류회사인데, 창업 당시 화물차 다섯 대와 직원 다섯 명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다섯 분 중 네 분이 창업멤버로 남았다.

화물차 다섯 대로 운임을 벌던 회사가 27년 만에 계열사 다 합쳐 매출 1조를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창업멤버였던 네 분은 모두 임원이 되셨다. 그리고, 내가 입사할 당시 그 창업멤버 중 한 분이 모태 물류회사를 책임지는 대표이사이셨다.


이 대표이사 분은 대학교 중퇴였다. 즉, 고졸이었다.


후광효과에 의존했다면, 이 분이 대표이사까지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처럼 스펙을 따지는 분위기에서는 화물차 다섯 대의 초소형 물류회사에서도 채용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분은 27년간 회사의 위기와 기회를 다 겪으며 총 매출 1조를 넘는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고, 모태기업을 책임지는 대표이사로 오랫동안 재직하고 계셨다.

창업주가 장인정신으로 진흙을 다져 만든 도자기. 보석보다 낫지 않은가?


(제일 처음에 썼듯이) “아무리 갈 데가 없어도 여기는 가지 마라.”는 말을 듣던 B건설. 그 회사는 ‘진흙을 뒤져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으로 핏물의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았고, 지금도 계속 커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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