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 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故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프로이직러가 알려 주는 이직의 기술. 어느새 마지막 챕터까지 왔습니다. 제목 앞에 ‘에필로그’라고 덧붙여 놓으니 왠지 아쉽기도 하네요.
고인이 되신 신해철 가수님의 ‘민물장어의 꿈’을 잠시 발췌해 적었습니다. 바다로 가고 싶은 민물장어. 그 염분 높은 곳에 가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고 곧 죽겠지만, 그 곳에 ‘한번 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기꺼이 가려는 민물장어.
뭐, 우리 프로이직러들이 그런 민물장어 감수성으로 어느 기업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건 아닙니다. 가급적 가늘고 길게, 최대한 능력 발휘하면서 오래오래 다녀야죠. 소금물 들이키는 민물고기의 갬성은 넣어둬 넣어둬.
다만, 언젠가 긴 여행을 끝내긴 해야 합니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진 않을 것이고 그저 담담하게 조용히 끝내겠지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끝내긴 해야 합니다.
프로이직러의 마지막 단계. 그건 [이직을 멈추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모든 모순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이직을 멈추기 위해 계속 이직해 온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이직을 계속 할 수는 없습니다. 잠시 언급한 대로 3~5년 주기 이직을 한다면, 대략 4~5번째 회사에서 40대 중후반 나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이직하기 어렵죠. 정착하기 싫어도 정착해야 합니다.
억지로 정착해야 할 나이에 그리 좋지 않은 회사 재직중이라면 좀 괴롭겠죠. 40대 중반을 넘어가서 ‘긴 여행을 끝낼 곳’에 머물러야 하는데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라면 정신적인 압박감이 꽤 큽니다. 저도 재작년까지는 그랬었구요.
천만다행으로, 저는 만 46세(한국나이 47세)에 ‘긴 여행을 끝낼 곳’을 찾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당당하게(!) 쓸 수 있기도 하죠. 제 실명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이직 시도하면서 ‘이직의 기술’ 쓰고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47살에 찾아낸 마지막 직장. 이대로 정년까지 가늘고 길게 갈 수 있을 것 같고 그렇게 하고 싶은 직장. 긴 여행을 끝낼 직장.
저 자신을 기준으로, 이렇게 ‘마지막 머무를 곳’의 요건을 따져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최소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월급 나올 회사
2) 고정적으로 내 할 일이 있고 가아끔 도전적인 직무가 주어지는 회사
3) 사내정치, 친인척 문제 등 업무 외적인 요소가 최소화된 회사
4) 본인 일 열심히 하면 다른 거 신경 안 써도 되는 회사
정도일 것 같은데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1) ‘안정적 월급’입니다. 이게 거의 90% 이상 차지하죠. 40대 중후반 지나서 애들 교육에 들어가는 돈이 폭증하는데 월급 끊기면 대략 난감… 월급 잘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거기에 다른 요소들이 한두개 갖춰지면, ‘마지막 회사’가 결정됩니다. 아 이제 여기서 회사생활 마무리짓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운 좋게 그런 회사를 찾았습니다. 감히 성웅 이순신 장군님의 말을 인용하면 천행(天幸)이었죠. 기대하지 못한 때에 갑자기 훅 찾아온 기회였습니다.
물론 모든 프로이직러가 그런 기회를 찾을 수는 없겠죠. 이건 개인의 실력과 무관합니다. 우승반지를 원해 양키스로 이적한 모든 프로야구선수가 그 해에 우승하는 건 아닌 것처럼, 어느 정도는 운이 따라 줘야 가능한 일입니다.
모두가 누릴 수는 없지만, 한 번 찾아오면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 프로이직러 생활을 마무리짓고 다시 말뚝충성맨으로 변신(!)해서 정년퇴직까지 가늘고 길게 살아야 할 기회.
이건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러니 평소에 계속 신경쓰고 있어야겠죠.
잠시 사족을 덧붙이면… 이 ‘마지막 회사’의 기준이 모든 프로이직러에게 다 똑같은 건 아닙니다. 각자 기준이 다를 것이고, 또 ‘나이’에 따라서 기준이 바뀌기도 하죠.
30대 초중반 프로이직러라면 ‘대기업 간판’을 중요하게 볼 것입니다. 남은 직장생활이 긴 만큼 [명함의 가치]를 중시하겠죠.
30대 후반 ~ 40대 초반 프로이직러라면 ‘직급’을 중시할 것입니다. 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는 연쇄고리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설 기회를 노리겠죠.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누군가는 ‘임원’을 노릴 수도 있을 겁니다. 임원 되려고 40대 후반 내지 50대에 이직하는 분들, 분명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냥 안정성이 최고였습니다. 임원 되면 좋겠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 없었고, 그저 애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계속 월급 주는 회사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부하직원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되니 그저 오래 다닐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습니다.
대기업 명함, 직급 다 필요없고 50대 후반까지 월급 잘 나오는 회사. 기왕이면 만60세 정년퇴직까지 노려 볼 수 있는 회사. 이러면 ‘따봉!’ 해 줘야죠.
대한민국의 많은 회사들이 그렇게 ‘따봉!’ 받을 수 있는 회사라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이, 이상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향을 의미하는 단어 유토피아(Utopia)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하긴 뭐, 가장 이상적인 회사생활은 로또 급 행운 얻어서 즉시 회사 그만두는 거겠죠. 사업 리스크를 0으로 줄이기 위해 회사 팔아버리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민물장어의 꿈처럼 마지막 바다에 이를 수 있기를. 긴 여행을 끝내고 ‘정년퇴직’의 아름다움(!)에 미소지을 수 있기를.
1800년 전 프로이직러 ‘가후’처럼 천수를 누린 후 조용히 떠날 수 있기를.
IMF 전에는 많은 직장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건 이미 ‘카더라 추억’이 되어 버린 경험. 그 경험에 이를 수 있기를.
오늘 하루도 꿈꿔 봅니다. 예전에는 소시민의 꿈이었지만 이제는 중산층의 꿈이 되고 어쩌면 살짝 상류층의 꿈일지도 모르는 ‘정년퇴직의 꿈’을 꿔 봅니다.
프로이직러의 꿈.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