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불장난
마당에 서 뒷산을 바라보는 남편이 허망해 보였다. 저렇게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웃는다.
남편이 이 땅을 마음에 들어 하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뒷 산 겹겹의 잣나무가 근사 했기 때문이다.
산등성이에 길고 뾰족하게 늘어선 잣나무는 꽤나 이국적이었다.
눈이 오면 특히 더 모습이 아름다웠다. 푸르스름한 저녁에 달이 뜨면, 루돌프가 썰매를 끌고 날아가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한 장면 같았다. 안개 낀 아침이면 뒷마당에 잣향이 가득했다. 숨을 깊게 들어마셨다. 깊은숨을 따라 몸속으로 좋은 향이 퍼졌다. 보약이라도 되는 듯 꼬박꼬박 잣나무 밑 담벼락 옆에 서서 향을 삼켰다.
잔해 같은 마음속의 끈적함이 말라가기를 바랐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저 숲에 들어가 보자며 매일 올려다보면서도, 공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오르 지 않았다.
공사가 한창이 던 그 해, 우렁찼던 태풍으로 뒷산의 잣나무가 모조리 넘어갔다.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한 방향으로 와르르 쓰러져 있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산의 나무는 점점 풀이 죽어가며 볼품이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산 밑 우리 작업실이 덩달아 풀 죽어 보였다.
길에서 훤히 보이는 이곳은 한 동안 주목받았다. 길 가던 차들은 서서 보고, 천천히 가면서 보고, 동네 어른들은 나무가 쓰러지던 날 새벽에 나던 소리를 재현해 가며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언덕을 올라오던 파란색 트럭 한 대가 급하게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창문이 열리고 엄지를 세운 손이 나를 향했다.
“아니! 기도를 열심히 했나 봐?”
“네?”
개응달! 나무들이 이렇게 한방에 넘어가주고 이제 겨울에 해가 좀 들겠어요”
“아… 네”
기초 공사를 해 준, 그러니까 내 병아리 부화기를 놀렸던 김사장님은 옆 마을에 가는 길에 나무가 자빠진 것을 보고는 급히 들어온 듯했다. 비 오는 날 축 처져 달라붙은 머리 마냥 엉켜 늘어진 나무들은, 보기만 해도 심란한 나와는 상관없이 보기 드문 큰 구경이 됐다.
그 후 산림과에서 조사를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클레인이 올라가 나무들을 정리해서 가져갔다. 산에서 끌려 내려가는 나무를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은 왠지 어깨가 처져 보였다. 산등성이에 별 필요 없어 보이는 잔 가지만 수북이 놓여있었다.
남편 마당에 두고 수반 겸 화로로 쓰려 던 철로 만든 원반을 오두막 앞에 들여놨다. 낙엽을 태울 겸 불을 붙였다. 흰 연기 사이로 매캐함을 가르고 반듯한 불 꽃이 우뚝 섰다. 화려하고 유연하고 따뜻한 그것에 반했다.
정말, 진심으로 반했다.
틈만 나면 불장난을 했다. 타고 있는 불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 졌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나무를 넣다 보면 반나절이 지나있었다. 나무가 부족했다. 뒷 산에 올라 켜켜이 쌓여 있는 잣나무 가지들을 발로 부러뜨려 한 바구니 씩 담아가지고 오두막 앞에 쌓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정리해 둔 나무들을 가늠하며 오늘, 내일… 나의 불놀이 가능 기간을 세어 봤다. 무섭게 불장난을 했다. 해야 할 것을 미룰 수 있는 만큼 뒤로 미루고 불에 영혼을 팔았다.
묻지도 않은 남편에게 나를 찾는 중이라고 둘러 댔지만, 불에 홀려 나 따위는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불이 사그라 들고 남은 재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불씨를 보면서 문득 봄 소풍의 보물 찾기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소한 보물은 아이들이 찾기 쉬운 곳에 숨겨져 있었다. 가까운 곳은 거들떠도 안 보고 깊숙한 곳으로만 들어갔던 나는 길은 잃어 봤어도 보물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때처럼 지척에 있는 사소한 나를 두고 엉뚱한 곳을 뒤지며, 있지도 않은 것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물음 앞에 한 없이 작아지고 움츠러든다. 왜 이제야 보편 한 물음을 이토록 곱씹는 걸까? 불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면서, 다 타들어가 하얗게 된 잿더미에서 나는 연약하고 투명한 불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뜻하지 않게 개응달에서 벗어났고, 눈먼 불놀이의 땔감을 얻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