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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향숙 Mar 15. 2023

16.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눈먼 불장난


마당에 서 뒷산을 바라보는 남편이 허망해 보였다. 저렇게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웃는다.


남편이 이 땅을 마음에 들어 하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뒷 산 겹겹의 잣나무가 근사 했기 때문이다.

산등성이에 길고 뾰족하게 늘어선 잣나무는 꽤나 이국적이었다.

눈이 오면 특히 더 모습이 아름다웠다. 푸르스름한 저녁에 달이 뜨면, 루돌프가 썰매를 끌고 날아가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한 장면 같았다. 안개 낀 아침이면 뒷마당에 잣향이 가득했다. 숨을 깊게 들어마셨다. 깊은숨을 따라 몸속으로 좋은 향이 퍼졌다. 보약이라도 되는 듯 꼬박꼬박 잣나무 밑 담벼락 옆에 서서 향을 삼켰다.

잔해 같은 마음속의 끈적함이 말라가기를 바랐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저 숲에 들어가 보자며 매일 올려다보면서도, 공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오르 지 않았다.


공사가 한창이 던 그 해, 우렁찼던 태풍으로 뒷산의 잣나무가 모조리 넘어갔다.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한 방향으로 와르르 쓰러져 있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산의 나무는 점점 풀이 죽어가며 볼품이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산 밑 우리 작업실이 덩달아 풀 죽어 보였다.

길에서 훤히 보이는 이곳은 한 동안 주목받았다. 길 가던 차들은 서서 보고, 천천히 가면서 보고, 동네 어른들은 나무가 쓰러지던 날 새벽에 나던 소리를 재현해 가며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언덕을 올라오던 파란색 트럭 한 대가 급하게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창문이 열리고 엄지를 세운 손이 나를 향했다.


“아니! 기도를 열심히 했나 봐?”

“네?”

개응달! 나무들이 이렇게 한방에 넘어가주고 이제 겨울에 해가 좀 들겠어요”

“아… 네”

기초 공사를 해 준, 그러니까 내 병아리 부화기를 놀렸던 김사장님은 옆 마을에 가는 길에 나무가 자빠진 것을 보고는 급히 들어온 듯했다. 비 오는 날 축 처져 달라붙은 머리 마냥 엉켜 늘어진 나무들은, 보기만 해도 심란한 나와는 상관없이 보기 드문 큰 구경이 됐다.

그 후 산림과에서 조사를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클레인이 올라가 나무들을 정리해서 가져갔다. 산에서 끌려 내려가는 나무를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은 왠지 어깨가 처져 보였다. 산등성이에 별 필요 없어 보이는 잔 가지만 수북이 놓여있었다.


남편 마당에 두고 수반 겸 화로로 쓰려 던 철로 만든 원반을 오두막 앞에 들여놨다. 낙엽을 태울 겸 불을 붙였다. 흰 연기 사이로 매캐함을 가르고 반듯한 불 꽃이 우뚝 섰다. 화려하고 유연하고 따뜻한 그것에 반했다.



불빛과 열기와 소리에 정신을 놓았다.


정말, 진심으로 반했다.


틈만 나면 불장난을 했다. 타고 있는 불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 졌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나무를 넣다 보면 반나절이 지나있었다. 나무가 부족했다. 뒷 산에 올라 켜켜이 쌓여 있는 잣나무 가지들을 발로 부러뜨려 한 바구니 씩 담아가지고 오두막 앞에 쌓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정리해 둔 나무들을 가늠하며 오늘, 내일… 나의 불놀이 가능 기간을 세어 봤다. 무섭게 불장난을 했다. 해야 할 것을 미룰 수 있는 만큼 뒤로 미루고 불에 영혼을 팔았다.

묻지도 않은 남편에게 나를 찾는 중이라고 둘러 댔지만, 불에 홀려 나 따위는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불이 사그라 들고 남은 재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불씨를 보면서 문득 봄 소풍의 보물 찾기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소한 보물은 아이들이 찾기 쉬운 곳에 숨겨져 있었다. 가까운 곳은 거들떠도 안 보고 깊숙한 곳으로만 들어갔던 나는 길은 잃어 봤어도 보물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때처럼 지척에 있는 사소한 나를 두고 엉뚱한 곳을 뒤지며, 있지도 않은 것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물음 앞에 한 없이 작아지고 움츠러든다. 왜 이제야 보편 한 물음을 이토록 곱씹는 걸까? 불 앞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면서, 다 타들어가 하얗게 된 잿더미에서 나는 연약하고 투명한 불 소리에 귀 기울인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뜻하지 않게 개응달에서 벗어났고, 눈먼 불놀이의 땔감을 얻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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