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해도 괜찮아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진 ‘미대오빠’의 이미지 덕분에 환상이 있었다. 우선 키도 크고, 길고 하얀 손을 가졌고, 예쁜 색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작업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우수에 찬 눈빛과 부드럽고 친절한 말투의 낭만적인 말. 미대에 가서 그런 오빠들을 보지 못했다.
우리 집 미대 오빠도 역시 그렇지 않다. 우선 하얗지 않고 감성보다는 이성과 판단을 주로 하는 자다.
그 오빠는, 주로 ‘아닌 것은 아니다’는 말을 잘한다. 그리고 공사 기간 동안 “일단 들자, 이거 조금만 옆으로 옮기자, 다시 떼자, 이 거 여기다 올리자” 라는 말을 주로했다. 여기서 들자, 옮기자, 떼자, 올리자 같은 것들은 테이블, 오두막, 벽, 대형작품 같은 것이다. 청유문이지만 내가 안 하면 미대오빠 혼자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거절할 수 도 없다.
“야 이번에 이거 두 번 일 안 하려면…”
“오빠~! 여태껏 두 번 일 안 한 건 없는데?”
“아, 그럼 세 번 일 안 하려면 ”
인정마저 빠르게 해 버리니 받아 칠 말이 없었다. 대체 내가 왜 두 번씩 세 번씩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감은 어이없이 반복 됐다. 예를 들면, 작업 실 앞에 세운 커다란 조형물 방향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조금이 약 30센티정도, 몇 미터 짜리 작품을 그만큼 옮긴 다고 얼마나 느낌이 다를까 싶은데 그는 ‘좀, 그래’ 라며 굳이 굳이 옮기고 싶어 한다. 옮겨도 잘 모르겠는 나와 달리 남편의 입꼬리가 살짝 일자인 것을 보면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오두막에 지붕을 얹은 날 주차장 담 밖으로 조금 넘어오는 지붕 옆 선이 ‘좀 그런’ 남편은 오두막을 밀자고 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가늠할 새도 없이 잽싸게 자동차 자키를 차에서 꺼내온 남편은 돌돌돌 손잡이를 돌려 벌써 오두막을 밀어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청유문에 매 번 토끼눈과 도끼눈 사이로 “내가?!”라고 크게 되물었다. 절대 안 될 거 같은 것도 남편의 ‘에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라는 초 현실적 긍정의 말에 힘을 입으면, 어느새 난 밀고 들고 올리고 있었다.
“그걸 밀었다고?!!” “왜?” 동생도 오두막을 자동차 바퀴 갈 때 차 들어 올리는 물건으로 밀어서 옮겼다고 하니까 신기했던지 이유를 물었다.
“ 또 좀 그렇대”라고 대답했다. “전화기 넘어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언니 우리 형부 별명 ‘좀 그르테’ 씨로 하자 큭큭큭, 아니 맨날 뭐가 그렇게 좀 그래 큭큭큭” 이상한 별명을 지어 부르니 기분이 좋았다.
전 날부터 그르테 씨가 말이 없었다.
“이제 사람을 불러야 할 거 같아” “왜?” 그의 입에서 처음 들어 보는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지붕 밑에 마지막 부분은 아무래도 사람 불러야 할 거 같아…”
남편은 고소 공포증이 있다.
작업실의 높이가 5미터 인 것도 그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의 최대치 이기도 해서다. 그럼에도 설치해 놓은 두 단짜리 비계에 오르는 게 무리인 듯했다.
“내가 올라가 볼게!”
“괜찮겠어?”
“우선 한 번 올라가 볼게. 오래됐지만, 아르바이트할 때 올라가 봤어, 나 조소과 나왔잖아!” 속으로는 조금 겁이 났지만, 걱정할까 봐 씩씩 함을 보태 말했다.
매 번 하자라는 남편을 타박했지만, 여태껏 남의 손 안 빌리고 한 성취감이 있는데, 여기서 조금 남은 벽 때문에 그것을 깨고 싶지 않았다.
올라와서 본 땅 밑은 생각보다 높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오빠 오케이! 나 할 수 있을 거 같아.” 고개가 빠지게 올려다보는 남편에게 손을 동그랗게 말아 괜찮다고 했다. 엉금엉금 내려와 땅을 밟자 남편이 내 엉덩이를 한참 두들겼다. 굉장히 신통한 모양이었다. 어깨가 으쓱했다.
거의 다 붙여 가던 날 대학 동기 오빠가 왔다. 지붕 근처에서 손을 흔들었다. “뭐야 십장 된 거야? 고속 승진 했네?” 인스타 그램의 ‘난 괜찮다’ 태그에 매 번 ‘안 괜찮다’라고 댓글을 달며 놀리는 사람이다.
승진이란 말이 나쁘지 않았다. 십장, 공사현장에서 가장 높은 자. 고속 승진에는 책임이 따랐다. 할 수 있게 되니, 공임이 많이 들까 봐 포기했던 뒷 벽 가장자리까지 벽돌을 붙이기로 했다. 긴 장마 사이사이 해가 나는 날은 꼭대기에 올라 마무리를 했다. 처음에는 붙이는 것보다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에 더 신경이 쓰여 일이 더뎠다. 며칠 후, 자리가 익숙해지자 마무리에 속도가 붙었다. 연신 오빠를 불렀다. 이거 줘라 저거 줘라 야무지게 남편을 부렸다. “예히이~”라고 당나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심부름을 하는 남편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조금 귀여웠다. 지붕과 벽이 닿은 면에 줄 눈 시멘트를 다 넣고 지붕 위로 팔을 올려 만세를 불렀다. 팔 월의 하늘에는 크고 토실토실 한 구름이 먼 산 끝가지 펼쳐져 있었다. 일당 중에 가장 비싼 일당이 벽돌을 쌓거나 붙이는 일이라고 했다. 또, 일당을 쓰지 않았으니 적어도 4~500 만원은 아꼈다고 합리화를 했다.
날이 더워져 새벽에 일 하고 뜨거운 낮에는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한 숨 자자고 했다. 해가 뜨기 전에 작업실에 도착 한 날 저 밑 동쪽으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음악을 틀고 앉아 오전을 다 까먹고 수다를 떨었다. 며칠 사이 벽돌로 인해 번듯하니 눈에 띄게 좋아진 벽면을 완성한 서로를 치하하며 앞으로 할 일들과 해 보고 싶은 것에 대해 얘기했다. 눈앞에 일이 널려있음에도 봇물 터지듯이 터져 버린 수다에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커피만 축냈다.
못 할 거 같던 일을 끝내 놓으니 괜찮음을 지나쳐 조금씩 스스로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게 의심하던 남편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졌다. 매 번 못 할 수 도 있다고, 괜찮다고 하는 남편 말이 와닿지 않아서 조바심이 났는데, 남편이 못 하는 것을 내가 메꿔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못 해도 괜찮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실감이 났다. 나머지 일도 이렇게 사이좋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둘이라 다행이라는 마음에 불쑥 젖어 들어, 뒤에서 남편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이기 이기, 아침부터 와 이라노”라며 팔을 휘 둘러 황급히 내게서 벗어났다. 좀비처럼 다시 팔을 벌리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만치 멀어졌다. 그런 남편이 우스워 교황님처럼 손 키스를 날리며 쫓아갔다.
낭만도 없는 우리 집 미대오빠는 벌써 저만치 가서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날은 이미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