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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향숙 Mar 15. 2023

17.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연습 중입니다.

다르게 사는 연습

양평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하던 십 년 전쯤의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천장이 팽팽 돌았다. 빈 속인데 구역질이 나서 변기를 붙들고 속을 게워내도 소용이 없었다. 회사에 전화를 하고 다시 누웠다. 눈을 감아도 뱅글뱅글 돌았다. 하루 종일 물만 마시고 다음 날 기어 기어 병원에 갔다. 아무래도 이석증인 것 같았다. 엄마도 동생도 한 번씩 앓았던 이석증 증상과 비슷했다. 혈액 검사와 이석증 검사를 했는데 이상소견이 없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던 의사는 하루에 커피를 몇 잔 마시냐고 물었다. 열 잔 즈음이라고 얼버무렸다. 그 이상이라 말하면 왠지 혼날 것 같았다. 의사는 카페인 중독이 의심된다면서 당분간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다. 속이 가라앉고 며칠 후에 생각 없이 커피를 한 입 먹고 바로 화장실에 달려가 다 게웠다. 그 후 이 년 가까이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반성했다. 커피의 기운이 사라지면 총명함이 사라질 것 같아, 하던 일이 안 될 때면 커피부터 찾았다.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커피가 아쉬웠지만, 금단의 커피를 막 굴린 몸뚱이의 대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다 한 번씩 한 모금이 간절했다. 차나 디 카페인을 마셨지만, 공갈 젖꼭지를 물은 것 마냥 헛헛함만 더 해 커피에 대한 탐욕만 키웠다. 자주 못 마시니 마실 때면 맛을 따졌다. 일부러 맛있는 집을 찾아서 설레는 한 잔을 꿀 물처럼 달게 마셨다. 맛을 탐색하기 이전의 커피는 뇌에 산소를 빨리 보내기 위한 하품 같은 것일 뿐, 맛과 향을 느끼는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실내 공사가 한 창이던 여름, 대학 동기 오빠가 냉장고를 선물했다. 냉장고가 생기니 물릴 대로 물린 김밥을 그만 먹고 싶었다. 밥을 해서 간단한 밑반찬과 먹으니 살 것 같았다. 거기에 더 해 아이스커피까지 욕심이 났다. 맛있는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뙤약볕도 견디고, 땀 쉰내도 사라질 것 같았다. 내친김에 커피를 볶기로 했다. 중독증이 가라앉고 한창 커피 맛을 탐 하던 때, 간간이 집에서 볶아 봤으니 커피 네 잔 값이면 한 달 동안 맛있는 커피를 넉넉히 마실 수 있었다.


생두를 주문해 볶기 시작했다. 이 십 분 만 투자하면 일주일이 너끈했다. 여러 종류의 원두를 시켜 실험 하 듯 볶아 맛봤다. 몇 달에 걸쳐 대륙을 한 바퀴 돌아 신 맛이 나지 않고 고소하고 묵직한 원두에 안착했다. 하루에 딱 한 잔, 오전에만 마셨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오후에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잤다.


아침마다 길고 하얀 테이블에서 커피 내릴 생각에 신이 났다. 작업실에 도착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맨 먼저 물부터 끓였다. 핸드믹서로 커피를 갈고, 뜸을 들이고, 물을 붓고 시간을 재면서 최대한 차분하게 내렸다. 마지막으로 서버에 모인 커피 향을 확인하고 두 잔에 나눠 담았다. 마치 경건한 종교의식 같았다.


나의 경건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내려서 그러고 싶냐?”

내린 커피를 막 입에 가져다 덴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는 어떤 건지 그러고는 뭔지 잠시 생각했다. 서서 커피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음 할 일을 정하며 꿀꺽꿀꺽 마셨다. 할 일을 찾으면 누가 쫓아오는 듯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채 이 분 도 걸리지 않았다. ‘개가 똥을 끊지’라는 말이 잠시 스쳤다.


커피도 앉아서 못 마시면서, 되게 다른 나를 기대했다.


며칠 후 남편에게 “오빠, 나 커피 앉아서 마시는 연습을 할 거야, 서서 마시면 얘기해 줘, 앉아서 마시라고!” 말해 두었다. 이상한 다짐에 남편은 웃으면서 이 번 기회에 한 번 잘해 보라고 했다. 작은 연습부터 시작해야 다른 나를 그려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공사 기록을 다시 짚어 보며 그토록 원하던 나를 찾았는지, 전과는 뭐가 달라졌는지, 질문에 답을 찾아서 결론을 맺고 싶었다.


오 년 전 마흔 살을 맞이하고 넘기는 사이, 마음은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다잡을 새 없이, 엄마가 쓰러지고, 수술을 하고, 나빠지고, 말을 잃고, 의식을 잃고, 보내기 까지 점점 좋아지지 않는 상황, 예전의 좋았던 시간을 떠올리면 그렇지 않은 엄마를 돌 볼 수가 없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 한 줄 알았는데 내 몸 어딘가에 쌓여 있었다. 엄마가 가고 참았던 마음은 후회와 반성을 더 해 시간차도 없이 밀려왔다.


그때쯤, 한 발만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마음을 붙들고 작업실을 짓기 시작했다. 자의 반 타의 반 시작한 공사 내내, 마치 고난과 시련을 몸으로 겪어내는 수행자에 빙의된 듯,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민 낯으로 불편한 나와 마주했다. 인정하고 싶은 것과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이 뒤엉켜 골라낼 수가 없었다. 몸이 고되니 마음은 단순해졌다. 단순함은 기대치를 한껏 떨어트렸다. ‘커피 앉아서 마시기’ 같은 사소한 습관부터 찾아 바꾸기 시작했다. 작은 습관들부터 바뀌면, 뒤엉킨 가닥의 실마리가 보이일 거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시골 작업실에 어울리는 사람, 여백이 있는 사람이고 되고 싶었다.


그렇게 찾던 나는 멀리 돌아 찾을 필요가 없었던 듯, 과거의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지금의 내가 되어 그냥 여기에 있었다. 카페인 중독에 걸리고, 한 잔이라도 맛있게 먹고 싶던 욕망이 커피를 볶게 하고 그렇게 볶은 커피를 결국 서서 마시고 그래서 앉아서 마시는 연습을 하는 지금처럼 말이다.


괜찮고 싶었던 것들이 괜찮아지는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도 괜찮아지는 중이다.



괜찮아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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