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nd me

지루하고 복잡하고 부끄러우니 읽지 마세요. 저를 분석하려고 올리는 거예요

by 휴사


현실 위에 내가 존재함을 똑똑히 알면서도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다른 어디서도 아닌 차가운 종이 위의 휘갈김.

'책'이란 매체 에서이다.


이 점을 확신한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이유 모를 힘이 생겨 살아갈 의지를 재차 다지게 하는 감정은

언제, 어느 때에 생겨날까 생각해 보니

내 경우에는 나와 다른 타인의 심오한 이야기에 감화되어

글이란 추상적인 매체 위에

선명하게 그려짐에도 뚜렷하지 않은 상상으로 계속 덧칠돼

내 이상과 맞아떨어지는 세계 속에 있다고 느낄 때.

바로 그곳에서 자신 있게 걸어볼 수 있다고 느낄 때였다.


눈물이 나올 때는

단순히 이런 순간뿐이지만

이러한 사실에 조금 자랑스럽기도 하고

내 감정선의 생명반응에 내심 안도하였다.

아직까지도 무언가에 이렇게 큰 자극을 받는다. 라


'눈물은 행복할 때 더 많이 나오는 법이더라'


그렇지만 그때의 눈물을

겨우 그런 두 글자, 한 단어로 단순히 치부하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한 단어가 한 문단씩은 되리라.

이런 것들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끄집어내 주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글을 조금씩 쓰고 있다.

순순히 죽고만 있지는 않을 거니까.





난 언제나 자신의 완전함을 입 밖으로 매끄럽게 표현하지 못해 왔다.

생각은 이만큼 하면서.

표현은 언제나 요만큼.

여기까지가 한계인건지.

내 짧은 견문 때문인지

그렇게 정해버린 건지.

바뀌고는 싶은 건지.

바뀌려고 노력은 해본 건지.


이런 시험지에 빠져들어 무의식의 한 귀퉁이에서 헤엄칠 때면

'이성은 답을 정하지 않기에 풍부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이런 식의 관점들이 대뜸 튀어나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 비춰보자면

내 몽상을 만족시키는 시각요소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며

당시엔 맘에 들던 것도 언젠가 타인이 일궈내어 나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분히 질려선지 금방 잊게 되었다.


하지만 내 것들은 언제나 한편에 남아주었다.

내 안에서만 존재하는 덧없는 특성 덕분에

더더욱 잊고 싶지 않아

무의미한 휘발을 멈추기 위해 모니터 너머의 평면에 소중히 기록해 놓는 것이다.


이런 게 기록의 쓸모 아닐까?





내가 죽는다면

나와 가까운 것들은 어떻게 바뀔까?

집중해야 하는 것엔

죽음이 아닌 변화다.


죽는 건 왜 무서울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 전에

가상 속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죽을 때라면

글의 시점을 서술해 주는 주인공이 죽어도 이야기는 종이 위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적어도 이야기를 쓴 이가 타인에게 말해주고 싶은 사상과 생각을 완전히 펼칠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화자가 넘어가지 않는다.

거기서 그친다.

내가 살아가면서 앞으로 어떤 것을 말하게 될지 이 세상을 창조한 이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로

당연하다지만 깊게 쳐다보면 아까운 이 모습에

내가 초연히 반응하게 되는 건 언제쯤의 미래일까?


간단하다.

조금씩 남는 미련이 결국 답을 지어주리라 믿는다.

어쩌면 끝까지 맺음짓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당장 내일에 정답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다들 오지않을 '오늘'의 변화를 꾀하는 게 아닌가?


난 이러한 생각의 연쇄를 그다지 멈출 생각은 없다.

지금이야 없지만

언젠가 치이고 치이다보면 또 멈추겠지

그 정도로 만족할거야?






내가 느끼는 감정들, 사고들, 사상들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깡마른 계륵 같은 생각들이지만 분명 소중하다.

그렇다면 더 많은 지성들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왜 행동을 멈췄지?

왜 중간에 그만뒀을까.

그것이 어떤 줄기로써 뻗어갔을지

얼마나 소중하게 변화했을지

몰랐으니까, 모르니까.

라는 식으로 합리화하던 과거는 이제 싫다.


내가 취하는 행동 중에 가장 보편화된 자기 위안의 형태이지만

원체 그런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니 행동에 다다르는 것 자체가 꺼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렇다면 날 비로소 움직인 것은 뭘까.

사람은 행동을 함에 있어

잃는 게 더 많으면 행하지 않는 이해타산적인 동물임에

나는 대체 무엇을 잃기에 실행하지 않았을지

과거를 의문했다.


불필요한 행동을 멈추고 꿋꿋이 달라지려 하는데도

어떻게 하면 이 결과에 다다르게 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난 아직까지도 날 제어하기엔 부족한 놈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조차

내 존재를

나란 사람을 100퍼센트

이해하게끔 할 수 있을까?


정확히 답을 낼 수 없었다.

왜 항상 타인에게

자신을 이해시켜야만 100% 인정받는 느낌을 갖는 건인지.

홀로 외로이 행하여 결과를 내면 도대체 왜 되다만 반쪽짜리 느낌이 기어 오는 건지.

온전하게 내가 가지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


의문점에 다음 한마디로 임시 종착점을 찍었다.


내 마음은 방음설비이다.

매일이 시끄럽게 울려대어도

문을 열지 않는 이상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모양새.


그렇지만 그 방이 방음임에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지 않고 일말의 여지를 남긴 행동에 대한 이유는


' 왜 이곳은 방음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 타인이 문을 열어보게 하는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제시하고 싶은 건 아닐까.


언젠가 방 문을 활짝 열어내어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내장과 같은 것들을 자랑스레 여겨보고 싶어졌다.






나는 원화가를 꿈꾸는 군인이다.

비록 전역이 코앞이지마는 임시 신분은 그러하다.


내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무엇일까.

물론 위에 서술한 순수한 즐거움과 몽상의 구체화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 파고들자면

사람이 아이를 낳는 유전적 본능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으니

타인에게 자신을 새겨 넘겨주는 것.

유한한 존재가 고안해 낸 무한의 한 가지 방법이다.


결국 남으려고 하는 의지였구나.

그 선율들이 퍼지고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 당도한다면

나에게 닿았던 많은 영감들과 소중한 것들이

똑같이 남에게 닿아 또 다른 것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었구나.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도

나아가 눈물 같은 것들의 의미를 만들어감에 있어서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인지할 때면

이런 소중한 것들이 허공에 흩어지는 것이

나에게 있어 너무 아쉬운 점이다.


이 형태는 곧 영원이다.

그러니 아쉽지 않아.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확연할 정도로 나의 감상과 타인의 감상은 다르고

나는 타인의 평가를 마음 깊숙한 곳에선 인정하지 못한다.


결국 내 속에서나, 타인의 속에서나

명확히 그려지지 않음에도

거우거우 언어로 표현은 가능한 시상이 드문드문 생겨난다.

내가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여 남들처럼 자세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타인은 저렇게 깊고 섬세한 정물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이 문단에서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가장 자신을 구체화시킬 수 있느냐' 다.

현재의 난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은 글씨를 접할 때가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 행동이며

다음이 이미지 그리기.라고 정해놓은 상태이다.

타인의 심상이 구체화한 그 자체의 증거인

완성된 영화, 그림, 사진들은 답이 정해져 있다.


물론 내게 진하게 남는 여운을 남겨주기야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죽을 때까지 들고 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글은 앞선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다.

배신하는 법 없이 나에게 탁 트인 공간감을 안겨준다.


슬픈 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 엔딩들.

이를 꽉 깨물 정도의 통쾌함.

이런 각기 다른 이미지는 나에게 상흔을 새긴다.

글이란 게 나에게 있어 그런 것이다.

누구나에게나 그런 것이라고 믿고 싶다.

너무. 너무. 너무너무 아깝고도 아까워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진다.



난 거기에서 그치고 싶지 않다.

그게 나의 바람이다.

'거기까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만 하고 싶어 진다.

그러니 내 길을 쉽게 끊어내는 말은 이제 얕게라도 무시하려 한다.



밸런스게임이란 참 쉽다.


화려함보다 담백함을

즐거움보다 음울함을

얕음보다 깊음을

달콤한 것보다 짭짤한 것을

뜨거움보다 차가움을

찬 음식보다 뜨거운 음식을

울림보다 침묵을

웃음보다 눈물을

사실보다 추상을

지면보다 구름을

생그러움보다 눅눅함을

동요함보다 초연함을

직도보다 샛길을

올곧음보다 특이점을

물질보다 가치관을

유행보다 신념을

영원보다 찰나를

적극성보다 무던함을


아. 역시 오늘도 달라지지 않았어.



여기까지가

마주 보고 있는 거울을 생각하고 지은 제목의 글이다.


정의를 내리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나를 다듬어 나가는 글.

이런 글은 내가 살아난다는 전제하에 끝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한 번씩 써보면 좋은 것이다.


시중의 이야기들은 일련의 끝이 있다.

오픈의 엔딩이건, 온점을 찍던

그 끝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가벼운 손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 맺음 지어질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대감이 올라간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책은 다르다.

무더기처럼 쌓아놓은 페이지가

통째로 뜯겨나가

허무히 녹아 없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의 내 상황처럼


그런 상황에 뒤따를 감정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감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치 내가 섭리에 대해 불가침을 맺은 사람처럼

"나는 아닐 거야"라는 생각조차도 담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 여유도 없고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다지만

뜯겨진 페이지들이 뒤숭숭하다. 는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을 남겨오기에

내게 열심히 펜을 혹사시키는 행동은

if라는 흥미로운 가정과

너무나 아까운 것들을 보관이라도 하려는 마음들로 점철된

끝없는 기록을 끄적대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저 나의 데이터를 백그라운드에 입력해 놓는 것만으로

날 더 명확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런 식으로 쓰는 중이다.

결코 나의 엔딩을 뒤숭숭하게 끝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