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글 쓰고 있다."
오늘도 내가 너에게 말을 건넸다.
"정형화된 시놉시스나 미디어 매체들을 보고 있자니 궁금해진 게 하나 있는데
사람을 수렁에 빠트리는 것은 왜 여우처럼 미력적이면서 동시에 위험을 품고 있는 개체일까?
그리고 왜 항상 그렇게 위험한 것에 빠져들어 스스로 죽길 원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걸까?
"아. 오늘도 뭔가 했네.
난 그런 복잡하고 따분한 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유시영. 네가 웬일로 글 같은걸 다 쓰고?"
왜 그렇게 사랑이란 것에 집착하고
왜 그렇게 헤어지지 못해 안달하는지.
조금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은아가 내 말에 대꾸해 주었다.
이렇게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그녀는 원체부터 조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니 달리 신기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왜라고 이미 물음표를 붙였네?
그렇다면 말이 쉬워질 것 같은데.'
숨을 한차례 들이키고 나는 말을 쏟아낼 준비를 하였다.
"난 그런 적 없어."
내 들이킨 호흡이 툭 끊겼다.
두서없이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는 뜻 모를 심지가 담겨 있었지만
차갑게 잠긴 목소리에도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손에 조금 땀이 배어든 채로.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무튼 정말 유명한 작품들에
클리셰로써 여러 차례 기용될 수 있었던 사실을 파헤치다 보니 흔하다는 사실 자체가 내 문학의 목표점에 번뜩 영감을 줘서 말이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을 겪었고 그걸 서기의 경험이나 독창성을 더해 살짝 비틀어 전체적인 형태를 가리는 것을 클리셰라 칭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렇게 사람들에게 은근한 공감대를 얻기도 하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여 자연스럽게 독자의 경험과 비교시키면서 흥미를 가지게 하는 형태더라고."
'이쯤 하고 주제로 돌아가면 아름답지만 내가 취하지는 못하는 이들에게 여우라는 수식어가 붙이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사족이 좀 길었는데 최근에 내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지 말해줄게.
보통은 사랑이 관련된 이야기에 특히 여우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는 이유라고 함은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다양한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겠지. 일방적인 사랑 같은 흔한 이야기들 말야.
남자란 게 네가 아는 이상으로 정욕에 잘 휩쓸리거든.
그래서 매혹적인 자가 다가오면 떨쳐내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거지.
한번뿐인 감정에 몸을 맡기는 걸로 만족하기 위해서일까?
여자 쪽에서 그럴 맘이 있었든 없었든 남자는 그 사실엔 관심 없는 듯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여자는 떨쳐내려 하고 남자 쪽은 붙잡으려다 자멸하는 거지.
언젠가는 벌어지게 될 상황이지만 결코 거기까지는 닿지 않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설정하여 보다 강한 자극을 끌어내려고 의도한다는 이하의 내용이
내가 이번에 쓰고 있는 산문이야."
'아. 좀 말이 길었나?'
잠깐의 침묵 이후에
이내 은아가 방바닥을 내리치며 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런 거라면 관심도 없으니까 그쯤하고 닥쳐.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내 둔한 감각으로도 그녀가 머리끝까지 열받은 게 느껴졌다.
하기사 오늘따라 강인한 면이 있는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 하며 아까부터 티셔츠의 목 부근을 쥐고 열을 삭이는 몸동작으로써 날이 서있는 상태였다는 건 언뜻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 오늘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나.
은아가 내 집에 와 있는 이유만 해도 그녀가 최근에 겪은 나름대로의 아픈 사연 덕분이니까 말이다.
"내가 오늘따라 말이 좀 많았다는 건 인정할게.
그래도 아까부터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 때문에 노력하는 나에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알았다고."
분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름의 성의를 봐서라도 그렇구나. 정도의 말로 대꾸해 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는 건가?
갑자기 울분이 치밀어올라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여우라는 생각은 안 해본 거지?"라는 식의 말을.
지금쯤이면 내 몸이 점점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도 알아차렸겠지.
사실 사랑에 클리셰가 어디 있냐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사실은 위로를 가장한 척 그녀에게 접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