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의 시계껍데기
사과가 깎였다. 내 자만 또한 그렇게 꺾였다
아침에 눈을 비비며 사과를 먹고 있던 어느 날.
껍질을 깎아내지 않은 채의 사과를 나는 표면만 슴슴히 닦아내어 그저 베어 물고 있었다.
그런 아무 결이 느껴지지 않는 행동을 하다 보면 차츰 무상의 사랑으로 깎아내어 정갈하기 그지없는 사과가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이제 예정대로 나는 내일 죽을 것이다.
누구도 내 곁에 남지 않을 인생이라 아깝지도 않았었는데 막상 뒤로하니 여기까지 생각이 닿는다.
견디다 못한 나는 오피스텔의 창문 특유의 삐걱거림을 무시하고 빠득빠득 열어젖혀 사과의 잔해를 저 너머까지 힘껏 내던졌다.
사라지기 전. 딱 한 번만 다시 회상하고 죽는 것이다.
미련이 끝도 없어지기 전에, 이 아침이 지기 전에
딱 한 번만.
몸속의 내부저장소에 저장된 것들은 대게. 많은 것들에 덧그려져 본래의 형태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 것들 투성이다.
그렇지만 그런 식이어도 일련의 이미지가 재생되는 시점을 찾아냈다.
때는 대략 8살이었다. 그 시점을 자기 자신의 이성을 인지한 시작점이라고 정했다.
무력하다는 가정조차 통용되지 않는 논외의 나는
앞으로 끝없이 높디 높아질 계단에 겨우겨우 한 발을 뗐을 뿐이었다.
계단은 차가웠고 발은 그 한기를 흡수해 내 뇌를 적셨다.
어릴 적. 그렇게 발을 뗀 사실을 자각했을 때쯤의 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즐거운 것을 좇아보자'
부드럽고 뜨거운 계단 하나하나에 집중되어 구태여 위를 쳐다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 가진 찰나의 기억을 풀어보려 한다.
계단의 위에 무엇이 있을지도 관심 없는 채로
내 시계가 그렇게 움직인 순간에서 독백을 마쳤다.
14살.
하나하나 지르밟아 솟구칠수록
지면과 맞닿아있다는 감각이 멀어진다는 사실을 씹었다.
머리칼을 간질여주던 바람결은 어느새
조금씩 날 밀어내려는 듯 강해졌다.
당시엔 그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득히 올라갔다고 느껴왔다고 생각했을 때.
일부러 의식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내가 몇 걸음씩 올라갈 때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향년 29세.
나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데
그딴 건 너의 사정이라고 가벼이 무시하듯
어느새 발 밑을 쳐다보니 너르던 바닥은 숨통을 조여오듯 차갑게 식어가며 동시에 비좁아졌다.
거기에서 파생된 내 다리의 떨림에 조금씩 불만이 튀어나왔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싹틀 때
바람조차 내 몸을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까지 덤으로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때부터 시간의 흐름과 계단의 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서서히 힘 빠진 몸의 중심이 흔들려만 갔다.
어느덧 35세.
불안정한 몸의 균형을 끊임없이 신경 쓰며
계단이 얼마나 더 비좁아질까 두려운 마음 때문에
어느새 시선은 저 먼 곳으로 고정되어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상하좌우로 바삐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손톱조차 닿지 않는 벽장 위의 장난감에 손을 뻗는 어린아이의 간절한 손장난처럼.
그런 식의 얄팍한 행동은 나에게 그 무엇도 안겨주지 않았다.
그래. 그때 내가 만약 조금 더 나를 믿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후회로 점철된 곳들은 이미 내 시력의 저편에 존재했다.
꽤나 까마득하여 쳐다보고 있자니 두 다리가 위태로이 흔들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밑을 쳐다보는 일이 없어졌다.
애초에 나한테는 이런 식의 여유조차 사치였다고 애써 약해지는 마음을 밀쳐내고 또 밀쳐냈다.
아득한 시간을 지나오자 한 기억이 목구멍에 걸렸다.
그것은 어머니가 사과를 깎아주던 어느 여유롭디 뜨슨하던 날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둥그스름하여 단순 들고 있는 것도 마냥 쉽지 않은 이 새빨간 과일이.
평소 흔히도 보아온 둔탁하면서도 미약하다 생각했던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무결하게 다듬어지는 게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나는 아삭아삭 입을 놀리며 내심 자신 있게
언젠가 칼을 다룰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나도 저 정도쯤은 할 수 있을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게 일상의 모습이 된 즈음이 되며 그 기억을 매만지다 매장 코너에서 집어 들어 지겹도록 깨물던 깎아놓은 사과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밝고 불투명한 그때 그 과일과 비슷한 놈 하나를 집어 들게 되었다.
조심스레 칼을 쥐고 깎아내려 가다 보니 기억에만 의존했던 근거 없는 자신감은 녹듯이 사라지고
서투른 손놀림에 죄 없는 사과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기억 한 편의 넓고 일정하게 잘려나갔던 껍질이
좁아지고 좁아져서 결국 뚜욱. 뚝 끊겨져 나가 처량하게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때처럼 새빨간 과일이었다.
껍질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선명히도 검붉은 과일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피로 문질러진 그 과일이 내게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런 기억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이 나선의 시계 속, 초침만이 가득한 이런 곳에서
문득 이 공간의 형태가 내가 깎았던 사과의 껍질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불안정하디 불안정한 내 손놀림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발놀림.
베일듯한 손, 부러질듯한 다리.
점점 얇아지는 껍질과 이 계단.
인생의 모든 것은 서로가 서로의 형태를 나눠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고
나는 그제야 내 악점을 관찰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내가
나만이 원테이크로 인생을 살아가며 혼자만의 통증을 반복한다고 성내며 울부짖은.
그런 미숙함으로 넘치던 좁은 인생의 길목에서
한때는 지금의 나와 다를 것 없었을 넓은 등과 따듯한 손길을 그리워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미안했어
고마웠어
사랑했어
아쉬웠어
막상 앞에 서면 하지도 않을 말을 허공에는 잘도 뿌려댄
그 나쁜 버릇이 내 미숙함의 전부와 다름없었다.
이제 내 발 한쪽의 너비도 채 되지 않는 계단의 끝에서 멈춰서는 일 없이
망설인다는 감정을 잊기라도 한 듯 허공으로 힘차게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까지 내가 겨우내 올라왔던, 착실히 밟아온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저 상앗빛 계단의 추억들을
까마득한 밑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지켜봤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바닥에 부닥치고서야 알았을까.
내가 시작했던 저 흔적을 보다 보니
처음 이 땅을 밟았을 때의
저 조그만 발이 신고 있었던 설렘의 가치를.
이 설렘을 온몸으로 맞고 나서야 더 이상 어떠한 잔재도 내 몸에 걸쳐져 있지 않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래서인지 이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사했습니다.
내 인생이여
이젠 기억할 일은 없을 테지만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