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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사 Mar 23. 2023

차가운 세상과 뜨거운 태양의 교집합에서 비롯된 마음

클라라와 태양. 그 후

이 글은 독후감이다.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단순한 제목을 붙여놓은 적당한 두께의 소설책을 읽고 예상치 못하게 느낀 점들을 주르륵 나열하는 짤막한 서기이지만 애잔함에서 나오는 색다른 깨달음을 얻었고 이 책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감각에 빠져들다 보니

감명 깊게 읽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결코 이차원에 담아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나 자신이 오늘도 책에 깊게 매몰되고야 말았다.

주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이 감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나만의 것이라는 걸 확고히 다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클라라. 너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나는 멍한 상태로 몇 번이고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가 지나왔던 내용들을 훑었다.

내가 느낀 바가 이 작가가 노린 의도에 어느 정도 맞아떨어질까? 과연 나는 이런 결말로 만족하고 있을 것인가?

관점들이 끝없이 부딪혔다. 책장을 넘기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녀의 상냥함을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생생하게 느꼈다. 그렇기에 이러한 결말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다 설명하지 못할 정도의 쓸쓸함과 허무함, 안타까움 따위를 느끼고만 있는 게 과연 내가 이 책을 바르게 받아들인 형태일지 곱씹었다.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자신에게 부여받은 가치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해 결국 종막에는 쓰레기장에서 여느 존재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클라라의 모습에서 사람의 순환구조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존귀했던 따님이 이윽고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가치성을 마치 빼앗기듯이 자식에게 넘겨주고야 마는 평범한 부모의 일생과 클라라의 서사가 기분 나쁠 정도로 흡사함에 일종의 허무함마저 느꼈다.

대가를 바라마지않는 숭고하기 그지없는 헌신과 그 작동원리를 구성하는 주원료인 진심 어린 사랑만 있다면 어떤 결말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 말하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가 마치 예정되기라도 하듯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버려졌다는 사실 앞에 사람 특유의 혐오스러움의 단편인 이기적이고 개인을 중시하는 불변의 본성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즐거웠더라도, 소중했었어도 결국 하릴없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적응하는 사람의 작동방식으로 하여금 그것이 결국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고야 마는 걸까?

그렇다면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어릴 적에 나와 함께했던 많은 이들을 기억의 저편에 둔 채로 한때의 추억으로만 치환하여 소중함을 실물로 환전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덧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빛나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사라져 가는 수없이 많을 감정들에 곰팡이가 피는 건 역시 안타까운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멀어진 인연을 추억으로만 남겨두는 마음을 이해할 뿐.

실속과 본분만을 1번가치로 치부하는 여타 어른들의 차가움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조차도 휴대폰과 컴퓨터를 단지 구세대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그런 기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바탕 삼아 살아있었다고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함께하여 숨을 느낄 수 있었던 모든 도구들은 내 희끄무레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 이제 어디에서도 그것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과연 내게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난 살아있는 것들을 그렇게 내친 적은 없었다.

af. 즉 보육용 로봇을 사들였던 부모들은 어디까지나 -Artificial Intelligence Friend- 아이의 한때를 책임져줄 상품을 구매했을 뿐. 가족의 구성원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가 전부 자라나고 본분을 다 끝마친 빨대처럼 철제인간들을 쓰레기 속으로 내팽개친다.

형태도, 알맹이도 사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사람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만 단정 짓는 작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역겨웠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얼마나 사람과 유사하냐는 이미 그들의 존재가치에만 국한되는 문제일 뿐이다.

그저 내 아이의 유년시절을 책임지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자들을 쓰고 버린다.

이건 결코 가상에만 존재하는 모습들이 아니다. 책이니 이해를 위해 예시를 사용하고 내용을 눌러 담기 위해 에둘러 돌려서 표현했을 뿐이라고 짐작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자의 발상지와 성분이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듯한 행동을 보이는 작중의, 현실의 사람들은 과연 자신의 존재의의를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존재가치를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지난다면 과연 순순히 자신을 쓰레기통에 처박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성분과 알맹이를 중시하는 게 사람이면서 왜 자신들과 유사한 존재를 만드려고 애를 쓰는 건지 그 유약한 이유부터 재정립해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만이 가지는 특별함은 결국 우리가 그 특별함을 입 밖으로 말하고 기록함으로써 우리들끼리 낄낄대는 것을 세상에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특별함이 부여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날이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앞으로 우리는 자신들의 특별함조차 더 이상 빛을 내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잔잔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특이점의 시대가 도래해서야 사람들은 잃어가는 존재가치를 설명해 주는 것들을 찾으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나란 존재는 그저 많고 많은 상품조차 되지 못하는 흔한 고기로만 여겨질 앞날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까지 되어서도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것들을 진행하며 인간이기에 소중하고 존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나에게 중요한 건 모두가 소중하다는 식의 다루기 쉬운 논리 따위가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언제나 빛날 기회가 있는 사람의 마음.

그 생각이 타인을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한때 자신의 부모나 다름없던 사람의 뒷모습을 쓸쓸히 보내주며 한 방울의 슬픔조차 품지 않고 자신의 부러진 모습과 행동들에 후회 없이 행복해하는 기특한 -작 중의 클라라와 같은- 마음들이 허무하게 내쳐지지 않을 세상이 오면 좋겠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태양에게 허구의 희망마저 품어

존재하지 않을 기적까지도 만들어내는 절실하기까지 한 상냥함이

요즘같이 차가워져만 가는 세상에서 그것이 얼마나 쉽게 무시당하는 마음인지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문득 사람의 따듯한 면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아참. 뜬금없지만 책을 보면서 목젖까지 올라온 생각이 하나가 더 있다.

당신들과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하위존재이다. 

그러니 더 하위처럼 느껴지는 존재들을 쓰다듬을 권리만은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 더. 그 존재들을 죽일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 또한 하위존재에 지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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