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은 싫다. 싫었었다.
어떤 사람에게 신경을 쏟고자 하는 마음의 동작원리를 되새길 시간이 다시 찾아온 것 같다.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 그것은 나를 바꾸는 것과 남을 신경 쓰는 것.
이런 생각을 하는 주기를 줄여야 할 것 같은 강박감에 휩싸인다.
저 두 가지가 사회적 동물로써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다 못해 하나의 덕목으로 느껴져서.
나는 쇼핑이 죽도록 싫다. 나뿐만이 아닌 몇몇 내향적인 성향의 남자들은 대게 쇼핑을 싫어하곤 한다.
꾸미는 것의 기쁨과 충만감에 그다지 이입이 되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탐미하는 습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문제는 뒤로 하고서라도
일단은 그 행위 자체에 약간의 거북함부터 느낀다. 일단 여러모로 많은 것들이 소모되는 작업이니.
그렇지만 다행히도 혼자 즐기는 쇼핑은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하니 첫 번째는 그에 쏟는 시간을 내 페이스에 따라 조절할 수 있어서라 생각했고, 두 번째는 그저 그 상황에서 나와 함께하는 사람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에 나 혼자일 때가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사람에서 두 사람이 되면 생기는 변수의 가짓수는 제곱이 돼버린다.
그게 내가 사람이란 존재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혐오하는 이유이다.
다리와 발에서 아릿한 감각이 올라오고 피곤과 짜증이 몸을 조금씩 점령할 때면
똑같은 플롯을 지니는 일상적인 쇼핑이란 강도 높은 일과와 비교해도 그 피로감의 차이에서 별 다를 바가 없게 되는 행동이다.
결국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건 그 시간을 같이 나누는 타인의 가치에 대한 나의 확정이렸다.
유행을 따위로 치부하는 재미없고 심심한 내게 있어선 쇼핑몰이란 코웃음 쳐지는 전시장들에서 얼굴도 없이 나를 비웃는 마네킹들의 무미건조한 살풍경의 캔버스.
이와 같은 환경의 거부감을 뒷전으로 미루게 할 정도로 집 밖을 나서며 신났던 적이 있었나?
한번 정도는 있었다. 내 입으로 먼저 가자고 한 기억이.
한 사람과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녀와 기꺼이 삶의 일부분을 둘러보고 싶어 졌던 이유는
단지 그녀에게 맞춰주고 싶었다는 일념뿐이었을까?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좀 의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었을까.
가볍기 그지없는 지갑 한쌍이 비록 지닌 것의 전부일지라도
그런 상황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마음의 정체. 내가 직접 나서서 나 자신도 아닌 타인의 외견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그 의지는 지금도 서술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다.
그저 옷가지를 몸에 걸칠 뿐인 행위를 반복함에도 나름 간직하고픈 추억이 하나둘씩 쌓아 올려진다.
그녀가 내 앞에서 달라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의 모양을 모르면서도
얼굴 뒤편으로는 나도 모르게 감응한다.
왜 달라지고 싶을까. 그것은 오로지 물질욕과 본능적인 탐미성만은 아닌 것이겠지.
그 마음의 뒷면에는 무엇이 존재했을까? 나는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옷을 매개로 하여
한번 쥐어볼까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때만큼은 전속 코디네이터였다.
대중적 센스라곤 둘 이상을 갖추지 않았던 나의 추천은 그저 동력이 될 뿐.
나와는 다른 결을 가진 그녀 특유의 나보다는센스 있고 주관적인 견해 덕분에 끝에 가선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비록 그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오진 못했지만 그 이후 지금에 이르러서 가끔 길을 지나다가 의류매장 너머로 그때 봤던 것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옷들을 쳐다보게 되는 나를 바라보곤 그 꺼림칙한 사실에 피식대고 말았다.
기억난다. 그 질감이.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당시 가졌던 감정의 명확한 정체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둘은 없다는 가족들이나 셋 이상 만들기 힘들다는 절친한 친구들과 함께할 때도.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알기 쉬웠다. 그 당시의 참으로도 이기적이며 가난과 같은 것에 굶주려있으며 본능으로 가득 찬 내 모습은 나조차도 정말로 싫다. 지금도 비슷하게 진행중일 것이기에 별반 다른 감상을 주진 못하는 나의 쌩얼.
그러니 성장하고 싶다. 내 울타리 안의 사람에게 있어선 흔쾌히 코디네이터가 되어줄 정도로 나는 과연 타인이 아닌 타인들에게 충실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