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결국 희미해진다.
누구나 달라지는 신년이 몇 달이나 지나왔고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초년생으로서
나는 또 다른 변화를 꾀한다.
졸업 후 다년간 달라지기 위해서. 새로워지기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래서인지 결정적으로 날 바꿨던 것은 찰나의 환경이었다. 너무나 수동적인 결론이지만 사람이란 게, 나란 게 이 정도로 자가컨트롤이 불가능한 존재라면
내 속에선 왜 달라지려는 마음 또한 공존하는 것일까.
오늘도 나아가려는 마음과 주저앉으려는 마음이 상충한다. 이렇게 살다 죽어 쓰러져야 겨우 평행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중얼거리는 것은 또 어떠한 이유였나
꾸다 만 꿈처럼 멀어지기 전에 잡아내어야 한다. 글로라도 남겨야만 한다. 사라지기 전에.
그렇다. 나는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제야 숨을 쉬었다.-나는 그렇게 느낀다- 분명 생생한 꿈이었는데 이미 희미하다.
문득 내 주위의 모든 것들도 희미하게 보인다. 이 환경은 꿈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지.
꿈에서 깨듯, 도피하고자 하면 유구한 현시점이란 언젠가 소중히 여겼던 꿈처럼 천천히 사라져 가겠지.
이렇게나 선명하다 한들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와 세계라는 비투과성의 재질들이 점점 투명해지는 느낌이 덮쳐왔다.
잠시 딴소리를 하면 나는 이런 독백을 담은 글도 쓸 만큼 나름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그 말인즉슨 나에겐 보물들이 많다.
그런데 그 보물들 또한 몇 번의 밤이 지나가면 흙바닥에 털썩거리며 굴러다닌다.
내 몸을 내맡겼던 현실들조차 쓸려나가고 있음에 내 핏줄에서 힘이 빠져나오는 더러운 감각이 느껴져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렇게 찡그리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이렇게 물어봐도 대체 어떡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다.
내게 고개를 내민 것은 일종의 공허감이다.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내 삶. 내 구성체. 모든 것이 지금 이 새벽이 헤쳐지는 시간에서 희미해진다.
그래서인지 이런 글이 잘 써진다. 그래서 더욱더 변화해야 한다는 마음도 생겨난다. 그래서 잊고 살던 것들을 잊지 않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삶의 조그만 방지턱을 넘는다. 1년 반의 방지턱을. 국방의 의무의 방지턱을.
이곳도 이제 곧 희미해진다. 내가 이곳에서 떠올린 훌륭했던 잡념들도,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의탁했던 사람들도. 멀어지고 결국 사라진다.
사람은 기어코 잊는다. 누군가 말했었다. 잊어간다는 행위는 생존과 직결된 반응이라고.
한정된 뇌의 처리 범위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부하를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기억을 소거시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준비동작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되려 묻고 싶다. 그렇다면 그것 때문에 지금의 내가 아둔한 것이냐고.
과거를 잊은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과거를 잊고야 만다. 삶에 있어서 타인이 주는 교훈과 힘이 실려있고 뼈가 담겨있는 명언과 조언은 들으면 들을수록 플러스 요소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잊어버린다.
그래서 이렇게도 아둔하고 본능적인 우리란 생물은 습관으로써 기억하나 보다. 한 번에 하나의 꿈만 꾸는 사람처럼 나는 다음 삶을 살아나가는 수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고. 삶을 살다가 언젠간 삶에서 깨어날 그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에너지일지도 모르겠다.
'정녕 모든 것을 품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욕심이 너무나 과해서 나는 단 하나도 제대로 품고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