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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런던 일기 06화

100일과 달팽이

by 일영

커플들이 ‘100일’을 기념하는 것이 한국만의 문화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해외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길지만, 문화적 습관만큼은 여전히 한국인이다. 그래서 첫 연애를 하며 ‘100일을 기념해야 할까?’ 하는 것도 고민하게 됐다. 연애라는 것도,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


이로부터 두 달 전, 내 생일을 맞아 함께하려던 날, 남자친구가 갑작스럽게 코로나에 걸려 모든 계획을 취소했다.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만 남긴 채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그러던 중 무심코 지나가는 대화 속에서 기념일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친구는 100일 단위로 세는 기념일을 따로 챙기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아직 서로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괜히 까탈스러워 보이기 싫었다. 나 역시 기념일을 꼭 챙겨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기에,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추억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이 부족하면 내가 소중하지 않게 느껴질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첫 기념일은 챙겨야 하지 않나?" 하는 주변의 조언도 마음을 흔들었다. 내 생일도 그냥 지나가고, 100일마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면, 이후에도 계속 소홀히 보내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처음 하는 연애인만큼 같이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좋아하는 만큼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큰데, 만약 이게 나 혼자만의 마음이라면, 혹은 그에게 부담스럽다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혼자 살다 보니 나만의 시간이 많아 좋은 점도 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단점도 있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결국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자친구가 데려가준 곳은 소호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L'escargot였다. 소호 특유의 오묘한 냄새가 스멀거리는 어두운 골목을 따라,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을 지나 도착한 곳.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럽고도 따스한 불빛들이 우릴 반겨줬다. 음식은 훌륭했고,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나는 그저 맛있게 먹었다. 혀끝에 남는 향이나 양념의 디테일을 기억하기엔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념일을 축하합니다’라고 적힌 디저트가 나왔을 때, 직원이 우리에게 몇 년이 되었냐고 물었던 순간이다. ‘100일’이라고 대답하니 직원은 얼빠진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가 진심으로 이날을 기념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괜한 걱정에 떠밀려 남자친구에게 기념하는 특별한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또 말하기 전엔 애인이 눈치챌 정도로 고민 서린 얼굴을 했던 미성숙함이 그 순간 부끄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찬 바람이 불어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는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인지, 남이 아닌 내 의지로 결정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두 번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남의 시선이 아닌, 온전히 나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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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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