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전트 스트리트, 옥스퍼드 스트리트
“옥스퍼드 거리에서 '오래된 것, 견고한 것, 영구한 것'은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겨진다.(1)”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전통적 가치는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들에 의해 무시되며, 거리는 화려함으로 채워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러한 모습을 풍자했다. 옥스퍼드 거리뿐만 아니라, 연결된 리전트 거리도 마찬가지다. 이 거리들은 런던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 거리 중 하나로, 많은 행인들의 눈길을 끈다.
처음 그곳에 혼자 갔을 때, 끝없이 이어진 상점들 사이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분명 티백 하나만 사려고 했던 나는 어느새 쇼핑백을 가득 들고 있었다. 꽃 향기에 홀려 산 조말론의 향수, 늘어난 티셔츠가 생각나 구매한 자라의 티셔츠까지. 정신을 붙들지 않으면 잔고가 금세 바닥날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옥스퍼드-리전트 거리를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낭비벽을 의식해서인지, 사람들에 치이는 것이 싫어서인지, 둘 다 이유가 됐다. 그러다 최근 엄마가 런던에 방문하셔서 리전트 거리의 버버리 매장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날, 에티오피아에서 온 어시스턴트 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그 건물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 한때는 아트 갤러리였고, 또 영화관이었으며, 버버리 매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가구점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전에는 몰랐던 영사기 구멍이 눈에 띄었다. 그 구멍에서 빛이 쏟아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울음, 감동을 선사했겠지. 다시 보고픈 장면이 있다면 머릿속으로 되돌려보는 것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못 뜨고 남아있었을 관객들이 상상되었다. 흘러간 시간의 잔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분명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이 거리에서는 영속성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라진 것이 분명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건물의 외관만은 법적으로 바꿀 수 없게 보호받고 있다. 덕분에 내부가 아무리 변해도 겉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서점이 카지노로 변하는 일이 있어도 겉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도 사람들은 ‘원래의 가게는 언제 사라졌지?’ 하고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는다.
하여 런던의 화려한 쇼핑 거리들은 그간 무수히 변한 모습들을 능숙하게 감추고 있다. 겉으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꼿꼿하게 서있지만, 내부는 부서지고 다시 태어남을 반복한다. 이곳을 지나갈 때 우리는 숨겨진 이야기들은 잊고, 눈앞의 화려함에 매료된다. 그러나 문득 발걸음을 멈춰보면, 숨어있는 영사기나 복원된 천장의 몰딩에서 과거가 희미하게 비친다. 그렇게 런던은 수없이 재탄생을 거쳐도 사라지지 않는 시간의 발자취를 품는다. 과거와 현재가 맞닿은 채, 런던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09.2024
(1) 버지니아 울프, 런던을 걷는 게 좋아, 이승민 역, 정은문고,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