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홉스골로 나를 부른 책
어느 식당에 문을 나서던 그 순간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가에 놓인 책 한 권이 시선을 끌었다.
그곳에 놓여 있던 낡은 사진첩 한 권. 표지를 장식한 사진 속 깊은 눈빛과, 얼어붙은 공기마저 담아내는 듯한 하얀색과 수묵화 같은 여백의 사진, 문으로 나가던 발을 멈추게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노란색 사각 마크와 읽을 수 없는 키릴문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N.G. 세계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담아온 명칭이다. 그 사진첩 속 주인공과 순록은 낯설고도 신비로웠다. 가이드 불가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홉스골 북쪽, 숲에서 순록과 함께 살아가는 차탄족을 쓴 책인데요.”
처음 홉스골에 발을 들였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8월 여름의 푸른 호수는 이미 나에게 충분히 감동과 황홀하게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이곳을 겨울에 다시 찾아오고 싶다는 갈망이 피어올랐었다. 얼음이 호수를 덮으면 순록을 몰고서 썰매를 타고 달려보고 싶다는, 어쩌면 아이 같은 상상이 불현듯 내 안에서 자랐다. 차탄족의 사진첩은 그 오래된 꿈에 다시 불을 지폈다.
나는 주인에게 책을 팔 수 없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한 권뿐인 소중한 책이라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한국어판은 없고 몽골어판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 글은 몰라도 사진만으로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마트폰에 책 표지만 찍어두고 마음속에 묻어둔 채 여행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인연은 늘 우연을 가장한 채 우리 앞에 나타난다. 몽골 오프로드 9일간의 여정을 마친 귀국길, 공항 면세점에서 승일씨가 내게 전한 소식,
“식당에서 보시던 그 책이 저기 있어요.”
나를 이끌고 가는 승일씨가 기특하고 이뻐 보였다. 내가 식당에서 잠시 보았던 사진첩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따뜻해졌음은 물론이다. 책을 들고 카운터 직원에게 보이니 미화 150달러라고 계산기로 보여준다. 비록 150달러라는 값이 적잖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 담길 시간과 기억을 생각하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품에 안았고, 출국 대합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사진첩 속, 차탄족의 얼굴은 겨울바람처럼 단단했고, 순록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다. 모닥불 앞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문명의 빛에 길들여진 내 삶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겨울에 이곳으로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마음이 되살아났다.
비행기 안에서도 두꺼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과 흰 설원 위로 펼쳐진 차탄족의 겨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 그러나 그 추위를 견뎌낼 생각에 오히려 마음은 뜨거워졌다. 문득 평창동계올림픽 당시에 지급 받았던 방한복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가면 그 옷부터 찾아야지.’ 이런 사소한 생각조차 곧 다가올 여정의 징표처럼 느껴졌다.
사진첩을 접어두고, 잠시나마, 꿈속에서, 카메라와 드론을 들고 설국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하얀 꽃송이처럼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순록 떼가 유유히 호수 위를 건너가고, 차탄족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꿈은 현실보다 더 선명했다. 마치 장자와 나비처럼, 그리고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을 때, 꿈의 장면이 스르르 꺼지듯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 앉은 기후씨에게 무심코 말을 건넸다.
“겨울에 홉스골, 한번 가야 하지 않겠어요?”
뜻밖에도 돌아온 대답은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혔다. 내년 2월 항공권을 벌써 예약해 두었다는 짧은 한마디였다. 나도 모르게 이유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운명을 확인한 듯, 내 마음과 기후씨 마음이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몽골 오프로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산, 한 권의 책은 흔한 사진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탄족의 삶을 통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감각을 깨워주었고, 다시 겨울 홉스골을 찾아가야만 한다는 소명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흔히 말하는 여행 기념품은 손에 잡히는 물건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념품은 마음속에 새겨진 약속이 아닐까. 그 약속은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있다. 겨울, 순록의 숨결이 하얀 하늘로 피어오르는 그 땅에서,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인지.
후기; 집으로 돌아와 사진첩을 사진으로 찍은 후, PDF 파일로 만들어 번역기를 돌려서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2월 항공편을 예약했다. 그리고 기후씨에게 카톡으로 문자 하나를 보냈다. “나도 예약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