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승타사르해 저녁노을 바라보며
드디어 엘승타사르해 게르촌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밤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미 도시는 불빛으로 환해지고, 사람들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깊은 밤으로 접어들었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몽골은 달랐다. 위도가 높아서인지 해는 여전히 하늘 끝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붉게 번져가는 저녁노을은 마치 늦게 찾아온 나그네처럼,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내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녁노을은 언제나 내 마음을 멈추게 한다. 하루를 차곡차곡 정리하듯,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듯, 그 붉은 빛은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살아오며 지나쳐온 일들, 때로는 서툴게 때로는 서둘러서 흘려보냈던 시간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마음을 흔든다. 오늘 하루의 피로와 고단함마저도 이 붉은빛 속에서는 잠시 위로를 받는다. 문득, 저녁노을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작은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누구라도 바라볼 수 있지만, 그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이는 또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노을이 전하는 삶의 위로
돌아보면 내 삶의 많은 순간에 저녁노을이 함께 했다. 어릴 적 포구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꿈을 꾸었고, 젊은 날 통기타 튕기며 친구들과 밤새우며 놀던 곳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은 나에게 꿈을 키워 주었다. 춘천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전철로 출퇴근하던 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노을빛은 하루의 고단함에 작은 위안이 되곤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 옥상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올려다보던 붉은 하늘은 잠시나마 나를 구속에서 자유롭게 했다. 출장길 차창에 비친 저녁노을, 퇴근길 골목 빵집 유리창에 스며든 노을빛, 그 모든 순간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빛에 마음을 기댔던 것 같았다.
이제 정년을 마치고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저녁노을은 예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단순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풍경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거울과도 같다. 살아온 길과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담아내는 듯한 저녁노을을 보며,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내 마음속을 채워가는 어떤 충만함이 있다.
게르촌 뒤로 솟은 바위산은 거대한 병풍처럼 서서 노을을 감싸안고 있었다. 곧 어둠이 내려앉고, 그 위로 은하수가 펼쳐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에 기대와 설렘이 차올랐다. 무거운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 가는 이 순간, 여행이란 목적지에 다다르는 일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임을.
오늘의 저녁노을은 먼 길 끝에 도착한 피곤한 발걸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다시 한번 내 삶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든 빛, 석양은 지고 별이 떠오르는 그 자연의 순환 속에서, 오늘도 작은 평온과 감사함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