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개인의 삶의 이야기도, 역사적인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은 활자로 된 소설 속의 이야기. 내러티브, 서사, 이야기. 나를 살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최대 원동력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하다. 거창하지만, 사실이다.
어릴 때는 말 그대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 가면 항상 800번대, 그것도 영미소설 쪽 서가를 즐겨 찾았다. 삼백에서 오백 페이지 정도의 책들, 그것도 시리즈라면 금상첨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주로 판타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아마 로맨스도 가미된? 한 사람의 성장과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좋았고, 그게 다소 평범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더욱 재미있었다. 해리 포터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접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행복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이 <타라 덩컨>, <섀도우 헌터스>, <다이버전트> 뭐 이런 시리즈들. (+기억을 떠올리다 본가 근처 도서관 대출 내역을 조회해 봤는데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빌렸던 책들의 면면을 보며 내가 잊은 책들이 정말 많다는 걸 깨달았다... 영미소설만 읽었다는 거 취소. 국내소설이고 외국소설이고 그냥 다 읽었네...)
조금 크면서는 판타지가 아닌 이야기도 사랑하게 됐다. 뭐, 어린이 시절에 좋아했던 동화들을 생각하면 애초에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만을 사랑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 치고. 기욤 뮈소나 더글라스 케네디 스타일의 소설, 현재에 기반을 둔 소설도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국내 소설은 잘 읽지 않았는데, 언제였을지 모르는(일기를 뒤져보면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순간부터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한국 어딘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매력도 깨닫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서사 속 감정에 대한 매력을 더 느꼈던 듯하다.
요즘도 이야기를 사랑한다. 잘 만든 이야기 하나를 읽을 때면, 그리고 읽고 나면 기분이 정말 좋다. 진짜 '이걸로 n일을 족히 살아갈 수 있어' 이런 느낌. 다만 어릴 때처럼 두꺼운 소설을 자주, 실컷 읽지는 못한다. 한 자리에 앉아 몇 시간이고 소설을 독파할 수 있었던 시간적 여유와 그 시기만의 집중력과 이런저런 것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근데 진짜 도서관 하나의 서가 한두 개를 1년간 도장깨기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다. 안식년처럼 독서하는 해를 잡고 책만 읽으며 보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단,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원래는 내가 이야기를 어떻게, 왜, 얼마나 사랑하는지 쓰려고 했는데 그냥 과거만 떠올리다 만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너무 열띠게 설명하는 것도 쉽진 않아서 이 정도로 줄인다. 아무튼 책은, 이야기는 참 좋아.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내가 읽을 책이 다 떨어지는 날이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자 힘이 되는지.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1012964
위 글에서는 <도둑맞은 집중력>을 인용하며 소설 읽기가 '타인의 삶, 타인의 감각, 타인의 고뇌를 자기 안에 데려오는 훈련'이라며 소설 읽기를 통해 우리가 '다양한 환경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인지적 유연성을 기르고, 어휘력과 언어 능력을 끌어올려 삶을 신선하고 세련되게 바라보고 표현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예일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은 오래 산다'고!! '타자에 대한 높은 공감 능력이 가져다주는 인간관계가 장수의 비결이기 때문일 것'이라는데, 솔직히 말해서 하루 30분 이상 소설을 읽으며 사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 정도의 시간적 여유와 문해 능력 등 장수에 기여하는 요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러니까 정말로 '소설 읽기'와 '평균 수명(혹은 사망률)' 사이에 직접적 관련성이 있는 걸까... 싶긴 한데 예일대 연구팀이 어련히 잘 파악했겠지? 그러니 그냥 나 또한 오래 살겠거니, 해야겠다.
좋은 이야기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 여기서 방점은 앞쪽에 둔다. 평생 책을 읽으며 살고 싶어. 고로 답은 저속노화... 책을 많이 읽는 것의 단점, 특히 소설 다독의 단점은 내 글쓰기 실력에 비해 글을 보는/읽는 눈만 턱없이 높아진다는 거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은 전문가들마저도 대개는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안목을 갖고 살기 마련이고, '내 능력 이상으로 눈을 높이지 않겠어' 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걸 안 하겠다 선택하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소설가와는 거리가 멀겠구나 직감했지만 그럼에도 늘 읽는다. 아,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몇몇의 장면을 쓰기 위해 그 안팤의 수많은 서사를 써내려가는 지난한 과정을 견딜 자신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그리고 당분간은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을 안락하게 영위하고 향유하기만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