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 사흘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하나 있다. 본문 일부를 찍은 사진이었던가, 인용구였던가 하는 무언가를 보고 '이 책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두었던 책이다. 그러다 이달 초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려고 책을 예약했는데, 내 예약순위가 8~9위쯤 되더라. 몇 주가 지난 지금 확인해 보니 예약순위가 7위까지 앞당겨졌다. 도서관에서 보유한 책이 두 권이긴 해도 내 앞의 대출자들이 대출 기간을 꽉 채워 빌리거나 심지어 연체할 경우 적어도 반년은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수준... 그래서 다른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찾아봤고, 운 좋게 발견한 책을 요 며칠 사이 순식간에 읽었다.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이다. 자주, 많이 사서 읽고 싶은데 금전적 이슈와 공간적 이슈... 사실 후자가 크다. 책도 일종의 부동산, 아니 동산이라서 공간을 꽤 차지하고, 현재 내 방의 책장은 꽉 차서 단 한 권의 책도 더 꽂을 수 없는 상태이며, 이사할 경우에도 책은 전부 무거운 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책을 사자니, 전자책은 도무지 종이책 같은 맛이 안 나서 영 못 읽겠다. 그리하여 나중에 더 넓은 공간에서 살게 되면 책을 마음껏 사야지 생각하며 현재는 도서관을 애용하는 중.
게다가 물욕도 별로 없는 편인 내가 어떤 책을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보통 내가 사서 소장하고 싶은 책이란, 첫 완독 경험이 아주 좋았고, 앞으로도 여러 번 읽을 게 분명하고, 인덱스 스티커를 붙이고 싶은 문장이 너무나도 많고, 나에게 필요한 문장 혹은 나를 아주 잘 표현한 문장으로 가득한 책이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이 딱 그랬다. 사실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미용실에서였는데, 머리 손질을 받으면서 첫 백여 페이지를 금세 읽어 나갔다. 물론 그날 케이팝 음악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더 빨리 읽었겠지만... 어쨌든 그 초반의 독서 경험이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사야겠구나, 직감했다.
미용실에서 돌아온 후, 그날을 포함해 오늘까지 총 사흘에 걸쳐 나머지 분량을 읽었다. 특히 어제 새벽에 책을 읽는 순간이 가장 좋았다. 그때 폰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책 읽는데 너무, 너무나도 좋군. 이런 걸 읽을 수 있다니 행복하네... 이런 책 한 권 만나려고 수백 권 찾아 읽는 거지.' 이때 읽은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사실 오늘 마저 읽은 후반부는 전반부만큼이나 짜릿하게 읽히진 않았다. 물론 어떤 책이든 내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초반부의 독서 경험이 가장 의외이고 가장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그걸 바탕으로 기대치가 점점 생겨나기 때문에 후반부는 필연적으로 나의 예상과 어긋나게 된다는 것도.
그럼에도 책이 전반적으로 참 좋았다. 제목은 <수치심 탐구 생활>로, '수치심'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책인데, 이전에 내가 읽고 마음에 들어 소장했던 브레네 브라운 박사의 <수치심 권하는 사회>와는 다른 결로 좋았다. 특히 전반부의 서술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내 이야기 같아서 연신 조용히 감탄하고 또 탄식하며 읽곤 했다. 어쩌면 내가 책의 초반부를 훨씬 더 놀라워하며 읽었던 건 '세상에, 나도 딱 이래!' 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고, 후반부에서 그만큼의 감탄을 내뱉지 않았던 건 그에 대한 뚜렷하고 뾰족한 해결책이 제시된다고 느끼지는 못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얻기는 무척 어려운 일일 테다. 어떤 문제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게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감정과, 그에 결부된 자기 자신의 이런저런 면모를 돌아보고 살펴보고 거기에 파고드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한없이 까마득한 일인지도 조금은 알기에, 그저 이 책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내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고 싶다.
책에 대해 제대로 된 후기나 독서 기록을 남기려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내용을 곱씹고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우선은 이 책을 만나 반가웠고 좋았던 감정만을 남겨본다. 책을 읽는 순간이 정말 즐겁고 어떤 면에서는 짜릿하거나 황홀하기도 했던 것과 별개로, 책에서 다룬 수치심이란 나 역시도 오래도록 천착할 화두인 것 같다. 책과 별개로, 혹은 이와 관련해 떠올랐던 건 우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아웃2>에서 '수치심'이라는 캐릭터 또한 애초에 기획했으나 몇 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는 것. 근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수치심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키워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이영지의 'Small Girl' 노래와 뮤비도 떠오른다. 이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나가고 싶다. 그게 괜찮은 글로 이어진다면 에세이에 등장할 것이고, 아니라면 내 일기에만 남을 것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도서관 대출 예약은 취소하고, 조만간책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