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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모 Oct 27. 2024

영영 나, 겨우 나, 결국 나


올해 완독한 <2018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는 내 마음과 생각을 건드리는 단어와 문장과 이야기들이 참 많았다. 거기서 포착한 언어들로 나만의 수필을 수없이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지금 쓰려는 이야기를 출발하게 만든 건 '영영 나'라는 표현이었다.


타인에 관해 잘 쓴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어째서 필연적인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지 매번 다시 배웠다. 그런 날이면 내가 영영 나라는 사실이 답답해져서 남들이 쓴 책을 필사적으로 꺼내 읽게 되었다.

-2018 일간 이슬아 수필집, <남과 나> 중에서


원문은 자신과 타인에 관해 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영영 자신이기에 타인에 대해 정확하게 잘 쓰기가 어렵다는 소리다. 그 맥락과는 조금 다르게, 나는 '내가 영영 나라는 사실'에 잠시 꽂혔다. 이 대목을 보자마자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영영 나, 겨우 나, 결국 나'


한편 아이유의 노래 '아이와 나의 바다'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수많은 소원 아래 매일 다른 꿈을 꾸던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아이유, <아이와 나의 바다> 중에서


이 가사를 처음 보았던 날 내 눈에 들어온 건 '겨우 내가 되려고' 였다. 겨우 내가 되려고. 겨우 나.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무수한 변화를 겪을지라도 나는 결국, 영영, 혹은 겨우 나이다. 나이고, 나일 뿐이다. 때로는 그것이 자부심이고, 때로는 그것이 절망과 좌절의 원천이 된다. 내가 고작 나라니, 혹은 내가 무려 나라니. 그건 엄청난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지금의 내가 겨우 나일 뿐이라는 게 속상하다. 시간이 지나 도달하게 될 미래의 나 역시 고작 나에 불과하리라는 게 암담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란 사람을 벗어나진 못하겠구나.


내가 나름 마음에 드는 날에는, 내가 영영 나이리라는 게 썩 괜찮게 여겨진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본질적인 부분은 계속 나와 함께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아무리 이상한 길을 걷더라도 나라는 사람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겠구나.


이도 저도 아닌 날에는, 내가 결국 나이리라는 사실을 그저 곱씹는다. 아무리 부단히 노력하더라도,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나는 결국 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는 미래의 예언이자 확신을. 그건 마음을 붙들어놓기에 꽤 괜찮은 사실 같다. 내가 언제까지나 나일 것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리 모두는 평생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만 하기에, 환생이나 빙의나 회귀 따위는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나로서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게 수십억 명에게 주어진 수십억 개의 답일 것이다. 때로는 내가 나라서 너무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나고, 때로는 내가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내가 나임을 받아들이기. 방황은 결국 평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안정을 안주로 쉽사리 치환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그냥, 나로서 방황하기. 방황의 전에도, 후에도, 그 과정에도 줄곧 나이기. 그게 미래와 현재와 과거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인 것 같다. 영영, 겨우, 결국 나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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