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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모 Oct 27. 2024

산뜻하게 살고 싶은데 난 아직 구구절절하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내가 이 원칙을 아주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나 자신만큼이나 타인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타인의 감정과 기분에 예민하고, 내가 어떤 이야기나 행동을 하기 전에 타인의 입장을 미리 생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개인주의적 혹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어서 나 자신을 생각하는 비중이 크지만,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타인에게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가진 습관 중의 하나는 무언가를 묻거나 요청하기 전에 이것이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는 게 상대에게 실례 내지는 민폐가 아닌지 고민하는 것.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생각이 강한 것도 같은데, 이는 아마 독립적인 성향 그리고 의지하는 행위와도 관련될 것... 여기에 대해서 쓰면 너무 길어질 테니 접어두고 우선 오늘의 이야기를 하자) 오늘 그런 고민을 할 상황이 있었다.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나와 상대 모두에게 사정이 있어 일정을 확정하기까지 약간의 난항을 겪고, 마침내 이달 모일로 결정된 어떤 만남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꼭 참석하고 싶은 특강을 발견했고, 기존에 정했던 만남과 시간대가 정확하게 겹쳤기 때문에 고민 끝에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조정했다. 상대의 사정도 있으니 또 확정된 날짜를 미루다가 오늘 다시 조율을 마쳤는데, 문제는 대화를 마무리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내가 또 다른 참석하고픈 특강을 발견했다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고민했다. 특강에 너무 가보고 싶은데, 불과 한 시간 전에 확정한 일정을 또 미뤄...? 상대에게 너무 죄송했지만 고민 끝에 다시 연락을 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의외로 내 예상보다 흔쾌히, 그리고 무사히 일정을 최종 조정할 수 있었다. 포인트는 이거였다. 나는 평소에 이런 상황, 다소 난감한 부탁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상황에 처할 때 상대 입장을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넘겨짚고 고민한다. 그게 내 나름의 배려이자 습관이었다. 최악을 상상하는 편이다 보니 걱정에 휩싸여 지레 포기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경우를 보니 예상보다 너무 쉽고 산뜻하게 해결이 되어버린 거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래, 너무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혼자 넘겨짚으며 고민하지 말고 좀 더 솔직하고 빠르게 털어놓는 게 나을지도 몰라.' 어차피 내 예상은 다 나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니까 실제로 상대가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잘 안 풀리면 그냥 거절당하는 거고, 최악의 경우엔 좀 안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거고, 잘 풀리면 긴 고민 없이 무사히 해결되는 거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런 태도는 너무 상대방에게 (책임이든 결정권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떠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위에서 내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 아닌지 고민한다는 얘기를 했다. 살다 보면 그런 물음들이 있다. "필기도구를 안 가져왔는데 펜 하나만 빌려줄 수 있어?" "이거 한 입만 먹어도 돼?" "나 이거 잠깐만 구경해도 될까?" 이런 질문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의 답을 내놓는다. 나도 가진 여분의 펜이 없고, 이게 마지막 한 입이었고, 차마 보여줄 수 없는 무언가였던 게 아닌 이상 그런 질문을 받고서 "아니, 안 돼" 라고 답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렇게 답이 정해져 있는, 통상적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건 사실상 강요나 요구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타인이 나한테 그런 요청을 하는 건 상관 없다. 다만 내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역시 타인과 나에 대한 이중잣대... 단 내 쪽이 더 엄격한...)


같은 맥락에서, 내가 할 고민('상대가 이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이걸 어떻게 조율해야 하지?' 등)을 충분히 하지 않고 상대에게 불쑥 말을 건네버리는 건 상대에게 무언가를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분하게 탁구공이 오고가는 핑퐁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일방적으로 스매싱을 때려버린다거나, 몇판 몇선승제로 경기를 할 것인지 상대방더러 결정하라고 맡겨버리는 것만 같다. 고민은 상대에게 맡겨 놓고 나는 속 편하게 있는 듯한 느낌이다.


https://www.allurekorea.com/?p=152494

얼루어 인터뷰에서 오은영 박사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내가 내 마음을 다했다면 그거로 끝인 것 같아요.

내 마음과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건 상대방의 몫이에요.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그 사람의 몫이고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얼마큼을 남길 건지는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예요.

진솔한 태도로 진심을 다해서 관계에 임했다면 내가 할 몫은 다 한 거라고 봐요.

오해해도 어쩔 수 없어요.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반응하는 건 상대방의 몫... 그렇지만 내가 어떤 마음을 어떻게 건네는지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박사님. 진솔한 태도로 건넨 진심이 너무 이기적이라면, 너무 마음씀이 부족하다면, 너무 날것이라면 어떡하지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문제의 답을 모르겠다.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나답게 말하는 게 상대에게 상처나 불편함을 줄 수 있다면? 당장 떠오르는 예를 말해보자면, '내향인들이 만남 후 헤어질 때 올리브영에 가는 건 따로 귀가하기 위함이다' 라며 내향인들은 누군가와 같이 귀가하는 걸 불편해한다는 밈스러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나도 따로 귀가하는 걸 좀 선호하긴 하는데 그건 상대가 불편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내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더 크고.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가는 길이 겹친다면 나는 같이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냅다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상대에겐 불편한 일일 수 있지 않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거랑 적당히 헤어지는 것 중에 무엇이 상대방에게 더 나을지 고민을 하고... 대충 뭐 그렇게 산다. 피곤한 성향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냥 이렇게 타고나서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한편으로 내가 이렇게 타인에게 말하고 타인을 대하는 모든 상황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남들은 보통 이렇게까지 많이 생각하고 고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저 말에 숨겨진 뜻이 있나...? 혹시 돌려서 표현하는 건가...? 혹시 내가 이런 의미를 감지했어야 하나...?


https://youtu.be/0cFnrbLyIfQ?feature=shared

기본적으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너무 지나치게 의심하게 말구요.

상대의 말을 두세 번 곱씹으면서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그건 정말 건강하지 않은 업무 습관인데 그 생각에 빠지는 게 너무 쉽습니다.

그런 마음의 덫에 빠지는 동료들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럴 때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님의 말씀이 도움이 됐다. 그러니까 또다시 대화의 핑퐁 비유로 돌아오자면, 내게 온 공을 너무 오래 깊이 의심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내 몫만큼 적당히 쳐내라는 것이겠지. 나처럼 생각 많은 사람은 아예 '상대방도 별 생각 없이 (말 혹은 행동을) 건넸겠거니' 하고 여기는 것도 나름 도움이 될 것 같다. 아 근데 저절로 행간이나 의도가 읽히면 어떡하죠 장관님... 차라리 아예 나이브해지는 게 답일까요... 마치 눈치 빠른 사람은 눈치 없는 척 굴듯이...


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소망엔 이런 것도 포함되는 것 같다. 너무 많이 머리 쓰지 않고 산뜻하게 말하고 산뜻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 물론 남들은 '이런 것까지 신경써...?' 싶은 것까지 신경쓰며 사는 건 나의 습관이라 이제 이런 생각은 익숙하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나의 예민한 성향을 인지하고 이런 나를 좀 더 잘 다루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이런 경험과 고민을 수년간 부단히 해오면서 나의 주관과 대처 방식이 생긴다는 거라 할 수 있을 거다. 아마 이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해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러한 무던함 또한 당신의 장점이리라는 말을 남겨둔다. 예민함과 무던함은 분명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양면적인 성향이라, 어느 하나를 좋고 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이 또한 예민인의 부단한 고민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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