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상담을 받으면서, 그리고 상담 받고 나서 한 생각. 상담도 캐해(캐릭터 해석)다. 그리고 난 캐해를 아주 좋아한다. 캐릭터 해석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 다만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것치고는 잘 못한다, 캐해. 뭐랄까, 눈치 빠르고 입담 좋고 어쩌면 풍부한 인생 경험이 뒷받침되어서 사람을 잘 보고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들 있지 않나. 사주나 타로 쪽 일을 하면 아주 잘할 만한 사람들. 난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나에 관한 것이든 남에 관한 것이든 타인이 떠먹여 주는 캐해를 좋아하고, 나 자신에 대한 캐해의 경우 그동안의 데이터베이스로 그나마 좀 쌓아온 게 있다.
아무튼 상담도 캐해다. MBTI나 TCI 검사 같은 심리 검사들이 더 대표적인 '캐해'이긴 하다. 근데 나는 내가 전형적인 엔프제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하고, MBTI는 이제 내게 너무 익숙한 주제라서 엔프제에 관한 새롭고 신선한 캐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심리 검사 결과로 도출되는 설명들은 좀 더 정형화된 느낌이다. 이미 데이터로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문장들 중 나에게 가까운 것들을 몇 가지 뽑아내어 정리해준 느낌. 그래서 '어 이건 아닌데...' '딱히...?' 싶은 것들도 종종 보이고,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 기계적 캐해, 자동 캐해라서 별로라고 해야 하나.
반면 상담이나 사주풀이(사주 상담이라고 표현한다면 상담의 범주에 들기야 할 텐데)의 경우 수동 캐해라서 더 좋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상담에서의 캐해란 이런 거다. 내가 나의 현재 상황이나 감정, 생각이라거나 과거부터 해온 생각들 같은 걸 술술 이야기한다. 그러면 상담 선생님께서 그걸 듣고서 'OO씨는 ~한 편인 것 같네요' 혹은 'OO씨가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이런 식의 반응을 하신다. 이런 걸 귀납적이라고 표현하기는 부정확하지만, 아무튼 나의 에피소드나 썰을 들은 다음 나라는 인간에 대한 예리하고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는 거다. 대체로 그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인데다, 설령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거라 해도 타인, 그것도 전문가의 입으로 듣는 캐해는 늘 새롭고 짜릿하고 재밌다.
사주풀이도 같은 맥락에서 재미있었다. 특히 나에게 잘 맞는 선생님, 그러니까 나의 경우 적중률이 높고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캐해를 많이 떠먹여주시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에 여러 번 사주를 보곤 했다. 미래에 대한 좋은 예측을 들으며 잘될 거라 믿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순기능이지만, 나에게는 그보다도 캐해적 측면이 더 많은 즐거움을 줬다. 아무튼 캐해는... 정말 재미있다.
'상담 캐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https://magazine.hankyung.com/job-joy/article/202312287579d
남이 해주는 내 ‘캐해(스스로 자신을 해석한다는 말)’만큼 재밌는 건 없다,는 말이 있다. 풀어 말하면 남들이 나의 성격이나 진로, 외양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MBTI, 사주풀이, 손금이나 관상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생일이나 성격 테스트 같은 간단한 과정을 거치면 ‘나’를 설명하는 글이 와르르 쏟아진다. 우리는 그걸 읽으며 오 이건 나 맞다, 라거나 내가 이렇게 보이나? 하고 고민하게 된다. 사실 이건 내가 나를 잘 파악하면 굳이 궁금하지 않은 사안들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를 잘 모르고(혹은 알려고 하지 않고) 나를 계속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럼 나를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외부에서 내 정체성의 모양새나 근원을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확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깊이 공감했다. 남이 해주는 내 캐해 재밌는 거 맞고, MBTI랑 사주풀이 일맥상통한다는 거 인정하고, 나 자신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도 타당하고,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그 원인이라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다만 '내가 나를 잘 파악하면 굳이 궁금하지 않은 사안'이라는 데는 조금 이견이 있다. 나는 타인에 비해 나 자신을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는 편인데(상담을 받을 때에도 그래 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해는 늘 새롭고 재밌다. 이제 나는 웬만한 인터넷 심리 테스트에서는 엔프제라는 결과가 나오게끔 체크하는 법을 대충 꿰고 있을 정도인데도, 이미 훤히 아는 결과를 다시금 확인받고 싶은 마음으로 괜히 그런 테스트에 응해 볼 때가 있다. 게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건 아직까지는 끝없는 과제(라기보다는 사실 재미있는 놀이) 같다. 나는 내가 이렇게 스스로를 파악해가는 일이, 그러니까 셀프 캐해가 어느 시점에선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적어도 아직까지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최근에도 한 친구가 내 글에 달아준 댓글을 읽고 '이게 나다운/나스러운 면모라니! 모두가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하고 놀라워한 적이 있다.
캐해 하니까 생각나는 또 한 가지... 나는 셀프 캐해만큼이나 타인에 관한 캐해, 특히 내가 좋아하거나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캐해도 좋아한다. 그래서 아이돌 덕질을 할 때도 캐해 이야기를 상당히 재미있어했다. MBTI와 엮어서 얘기하든, 자컨을 보고 얘기하든 멤버에 대한 인간적인 고찰이라고 해야 하나 통찰이라고 해야 하나, 캐해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팬들이 있다. 세븐틴 입덕 초반에도 고잉세븐틴 관련 캐해가 담긴 네이버 블로그 글을 비롯해서 그런 멤버 캐해를 재밌게 찾아보던 기억이 난다. 다만 이렇게 서치할 때의 함정은 '세븐틴 캐해'로 검색해서는 내가 원하는 잼.얘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원시인들은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벽화를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대충 뇌피셜이다), 고대와 중세 유럽에서는 음유시인들이 떠돌아다니며 시와 노래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나라에도 동네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들이 존재했다. MBTI부터 시작해 사주와 관상, 손금 따위의 비과학적인 미신은 우리나라에서 유구했으며(얼마 전에 방영된 '신들린 연애'를 보라...! 난 안 봤지만...) 서양권을 중심으로 한 외국에서도 별자리 점을 비롯한 점성술이 우리나라의 사주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캐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본능적이자 역사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자타 캐해에 대한 추구 또한 그 연장선 혹은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라 본다. 스스로에 대한 캐해이든, 타인에 대한 캐해이든, 그러한 이야기들에 사로잡히고 갇혀 그 사람을 한계짓고 그에 대한 편견을 갖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해도 되지 않을까. 글을 쓰는 이 공간 또한 어쩌면 거대한 나의 캐해의 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