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존재에 의미를 둔다. (feat. 양자역학)
상상해 보자. 당신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을 걷고 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 피부는 타들어가고, 가지고 있는 물은 떨어져 갈증에 시달리며, 주변에는 황갈빛 모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조난당해 혼자 한 방향으로 걷고 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당신의 눈에 저 멀리 한 마을이 보인다. 희망을 본 당신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그쪽을 향해 걷는다. 하지만 걷고 또 걸어도 마을과는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지기만 한다. 마치 내가 움직일 때마다 달이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문득 저 마을이 신기루인 것을 깨달은 당신은 아마도 삶을 체념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사실 신기루는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다. 단지 그 대상의 거리나 방향이 왜곡되어 보이는 것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난당한 사람에게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지,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신기루는 조난당한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오히려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을 더 크게 안겨준다. 그래서 사막에서 나타나는 신기루가 악명이 높은 것이 아닐까?
이렇듯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는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예시는 어떤 것이 있을까?
1935년 오스트리아의 과학자인 ‘에르반 슈뢰딩거’는 당시 ‘양자역학’이라는 새로 떠오르는 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을 요약해 당신에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고, 1시간 뒤 그 고양이는 어떤 이유에 의해 50% 확률로 죽는다. 그렇다면 1시간 뒤 상자 안의 고양이는 어떤 상태일까?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연히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상자 안에 있는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공존, 즉, 중첩되어 있는 상태이고, 고양이의 상태는 당신이 상자 속을 확인할 때 즉시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상자 안을 확인하지 않았을 때 고양이의 상태를 절대로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로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아마 이 말이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해한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직관적으로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상태’가 존재하긴 하는가?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좀처럼 상상되지 않는다.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마저 이 이론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 사고실험은 결국 실험적으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실제로 고양이를 사용한 실험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양자역학에 기인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런 중첩된 상태가 우리 주변에는 왜 존재하지 않죠?”
그 이유는 중첩 상태는 어떤 ‘상호작용’에 의해 없어지고 동시에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로 수렴하게 되기 때문이다.
표정을 찌푸리고 있을 당신이 눈에 보인다. 조금만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우주의 거의 모든 거동은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여기서 ‘거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혹시 내가 모르는 거동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거동은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가령, 당신이 물건을 만지는 것은 물체와 당신의 손에 의한 전자기적 반발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그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는 빛의 입자인 광자이다.
당신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빛이 당신의 책에 닿으면 책의 여백은 빛을 반사하고, 글씨는 빛을 흡수한다. 그 패턴이 눈에 들어와 당신의 망막에 맺히고 맺힌 상을 뇌에서 해석한다. 그렇게 당신은 책을 읽는다. 여기서도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는 광자이다.
이렇듯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거나 어쩌면 상호작용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앞서 중첩 상태는 상호작용에 의해 깨어진다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상자 속 고양이를 확인하는 것과 같이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나면 중첩 상태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매우 많은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당신은 땅에 발을 딛고 있고, 무수히 많은 빛에 둘러싸여 있으며 공기의 흐름, 혈류의 흐름, 호흡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상호작용과 함께한다.
그렇기에 무수한 상호작용 속에서 사는 우리는 중첩 상태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정의할 수는 있어도 맨눈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할 수 있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조금 생각해 보았고,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감정’이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다. 우리는 감정을 볼 수 있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감정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대방의 행동을 보고 상대방이 감정이 어떨지 유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방이 연기하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감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배우는 아마도 이 세상 직업이 아닐 것이다. 배우가 어떤 배역을 연기하든 배역의 감정은 배우 본인의 실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 수 없음에도 감정은 분명히 존재한다. 당신이 이성에게 느끼는 어떤 끌림, 약자에 대해 느끼는 연민, 잘못을 저질렀을 때 느끼는 죄책감 등 감정은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 생각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아서 의미가 있는 것이기보다 결국엔 존재해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조금 풀어서 쓰자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존재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신기루는 그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 같은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 조난당한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희망 고문일 뿐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의 ‘중첩 상태’는 무엇일까? 중첩 상태는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원자 단위의 아주 작은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가 간접적으로 관측할 수 있다. 따라서 중첩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감정이 볼 수 없을 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자역학은 물리학을 양분하는 하나의 이론이고, 감정은 한 사람을 이루는 뿌리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그 경계가 모호한 것이어도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그게 어떤 것이든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단지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