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엽령, 사선에 서다

남덕유산 폭설의 기억

by 뜬풀

영하 20도를 훨씬 밑돌 것으로 추정되는 기온, 눈발을 잔뜩 품고 들이닥치는 거센 바람, 한 발 바깥을 딛으면 무릎을 덮는 적설, 그리고 짙은 어둠... 동엽령에 올라선 새벽, 삶과 죽음의 경계에 제법 근접해 있다는 느낌은 의식보다 빠르게 몸으로 먼저 전해졌다.


패닉이 왔다는 동행의 말이 아니더라도 상황은 최악의 조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내리는 눈의 습기가 방수가 되지 않는 동행의 외투에 스며든다.

저체온증의 위협은 공포심을 배가시킨다.

지금 이곳에선 공감과 격려와 따뜻한 시각과 연대와 위로의 말들은 상대의 귓가에 닿기도 전에 얼어버린다.


그렇게 몸에 스미는 현실적인 위협을 걱정해야 할 때, 나는 뜬금없이 내 비루한 삶에 내려앉는 습기들을 떠올렸다.

막아낼 건 막아내고 보호해야 하거나 포근히 감싸 안았어야 했던 것들. 무심히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치했던 습기들은 이제 온 몸을 적시고 넘쳐 턱밑까지 나를 담그고 있다.

이러다 곧 익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동사할지도 모르는 동엽령 능선에서 하고 서 있다니...


다행히 여명이 온 산을 덮은 흰색과 섞이며 푸르스름하게 사위를 깨운다.

시야를 멀리 두니 앞선 이들이 두려움과 용기를 버무려 러셀한 산길이 삿갓재대피소를 향해 오롯이 이어져 있다.

고마운 마음 역시 의식보다 먼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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