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뒤깐의 기억, 아랫집보리밥의 추억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by 뜬풀

선암사해우소 뒤깐의 기억, 아랫집 보리밥의 추억

순천 선암사 초입의 승선교는 계곡으로 내려와 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봐야 제맛인데요.

아치 속으로 강선루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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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건 승선교 다리와 강선루 정자의 이름에 공통으로 신선이 들어가고, 올라가고 내려온다는 의미의 '승강'이 앞머리에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선이 '강'선루에 내려와 놀다가, '승'선교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죠. 일종의 활주로 같은 개념이랄까요.


선암사 겹벚꽃나무의 늦은 가을은 몇 잎 남지 않은 이파리만 흔들거릴 뿐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나무가 누렸던 찬란한 영광과 환희의 시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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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 화려하고 풍성한 겹벚꽃을 붉게 피워냈었지요.

선암사를 찾은 모든 이들의 카메라를 온몸으로 받아낸 핵인싸이자 슈퍼스타입니다.

그의 전성기는 일 년 중 봄철에 빠짐없이 돌아옵니다.


선암사의 해우소는 마렵지 않아도 꼭 한 번 들어가 봐야 합니다.

'뒷간'이 '뒤깐'이 되고, 쌍기역 하나를 시옷으로 갈아 끼운 뒤 앞뒤를 바꿔 시원한 '깐뒤'가 되니, 아무리 급해도 '깐 뒤'에라야 비로소 온전히 똥을 쌀 수 있다는 고승의 화두나 설법과 같지 않습니까.

인간과 뒷간의 관계, 인간과 똥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삼라만상의 관계는 무릇 이러해야 할지니, 그대 버려야 할 것, 놓아야 할 것들을 순리대로 떠나보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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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헛헛한 겨울밤, 소복소복 눈 내려 눈물 터질 것 같으면 정호승 시인 말마따나 훌쩍 다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암사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정호승, 창비, 1999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길 중간쯤에는 보리밥집들이 있습니다.

아랫집에서 점심과 동동주를 곁들입니다.

이곳의 보리밥은 진짜 촌놈인 제 입맛에는 어릴 적 비벼 먹던 맛을 거의 복원한 느낌이라 흡족합니다.

갈 때마다 저는 양은대접의 바닥을 긁습니다.

물론 동동주도 한 됫박은 주문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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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과 반찬 가짓수가 이날 산동무들의 머릿수보다 많습니다.

산동무들 중에는 콩나물처럼 무난하신 분, 톳무침처럼 정갈하신 분, 열무백김치처럼 깔끔하신 분, 무생채처럼 시원하신 분, 마늘쫑볶음처럼 포근하신 분, 목이버섯볶음처럼 유연하신 분, 시래기된장국처럼 구수하신 분, 배추겉절이처럼 순박하신 분도 계십니다.

다양한 개성의 산동무들이 비빔밥처럼 섞여, 붉게 물든 맛좋은 산행을 비벼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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