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어느 식당에 걸린 문장 하나

'구름은 바람 없이 못 가고 인생은 사랑 없이 못 가네​'

by 뜬풀


지리산 피아골에 마지막 단풍이 매달린 늦가을.

산에서 내려와 구례터미널 근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시각은 오후 4시.


저녁 장사를 준비하던 초로의 주인 부부가 지치고 허기진 객을 맞습니다.

뼈다귀탕과 지역 소주를 한 병 시켰습니다.


핏물을 빼기 위해 물이 담긴 큰 대야에 뼈다귀를 담던 안주인.

물기 젖은 고무장갑을 그대로 낀 채, 뚝배기에 뼈다귀를 담고, 그 위에 육수를 붓고, 콩나물과 부추를 집어 얹고, 화구 위에 올려 불을 댕깁니다.

평소 같으면 위생이 어쩌고 하며 불만이었을 텐데, 그래 그럴 수 있지 속으로 슬쩍 비켜섰습니다.

깊게 팬 주름과 굽어져 가는 작은 체구 때문이었을까요.


늦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은 파리가 극성입니다.

바깥주인이 반찬이 놓인 식탁 가장자리를 파리채로 내리칩니다.

너덜너덜 내장 터진 파리 한 마리가 채에 반쯤 묻었다가 털려집니다.

손님상에 파리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받으며 역시 본체만체하기로 합니다.

눈을 돌려보니 식당 벽에 인상적인 표구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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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바람 없이 못 가고 인생은 사랑 없이 못 가네"


어디선가 들어본 듯 아닌 듯,

삶의 정수를 녹여낸 듯 아닌 듯,

시적 허용이 과한 듯 아닌 듯,

제법 심오한 듯 아닌 듯,

조금 민망한 듯 아닌 듯,

그럭저럭 동의할 듯 못할 듯,


들여다볼수록 묘한 감정이 올라오는 문구입니다.

문득, 바람 탄 구름처럼 주인 내외도 사랑 엮어 인생을 걷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상념의 파편이 이리저리 튀려던 찰나, 뼈다귀해장국으로 보이는 ‘뼈다귀탕’이 나옵니다.

잎새주 한 잔 입안에 털어 넣고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패티김의 노래 ‘인생은 작은 배’에 저 문구가 등장합니다.

예전부터 전해지던 글귀를 작사가가 인용한 것인지, 가사 중 일부를 사람들이 빼서 쓰는 것인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제는 구름이 인생이 되고 바람이 사랑이 되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습니다.


올가을에도 휘적휘적 지리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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