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주는 놀라운 선물
나는 꽃을 좋아한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자연스러운 자연의 순리에 따라 관심 없던 꽃에 한번 더 눈길이 가는 시기가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코로나가 한참이던 그 때, 갈곳 없이 집에만 머물던 그 시간에 지치지 말자고 나에게 선물하던 꽃 한다발이 결국 꽃과 사랑에 빠지게 하고야 말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문앞으로 싱싱하고 예쁜 정성스러운 꽃 한발을 문 앞으로 직접 받아보았던 '꽃구독서비스'를 통해 나는 꽃을 통해서도 이런 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게 되었고, 예쁜 꽃잎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느냐며 정성스럽게 꽃꽃이를 하는 새로운 나를 보게 되었다.
딱 일주일이다.
꽃을 예쁘게 볼 수 있는 기간..
좀더 풍성한 꽃다발을 구매하면 그 중에 남아있는 한 두송이를 일주일 후 에도 바라볼 수 있었지만 대개는 일주일안에 시들시들 볼품없어졌다.
이제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나는 자꾸 꽃가게를 향했고, 예쁜 꽃 한다발 안아들고 있는 내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예뻤고 부자였다. 작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즐겼다. 생소했던 꽃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꽃꽃이를 하는 순간을 즐겼고, 이런 예쁜 꽃과 늘 함께 있고 싶다는 지경까지 이르자 이른새벽시장 죽노동과 다름 없다는 꽃시장을 누비며 꽃을 공수해야하는 노동까지도 매력있게 다가오며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직도 그 꿈을 접진 않았다. 새로운 나를 발견해주었고 향기로운 감성을 배웠기에 나는 아직도 꽃이 좋고 꽃에게 고맙다.
하지만 이제 나는 들풀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일주일만에 시들어버린 꽃잎이 아까워서, 버리기 미안해서 꽃이 늘 있는 예쁜 집을 잠시 포기했다.
거친 들판 속에서 아름다운 꽃몽우리를 터트리며 피어난 들풀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속에서도 꽃을 피워 몽글몽글 피어있는 토끼풀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꽃을 돈주고 사지 않는다. 길에 핀 예쁜 들꽃을 보는 재미도 나에게는 큰 기쁨이고 작은 사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이고 그 이름은 꽃 자자체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꽃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꽃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 인간의 행위는 분류를 위해서라지만, 동시에 자본주의화된 가치로 꽃들 사이의 위계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는 문제(56p)의 지적 앞에 나나는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배움에 관하여)
사람들의 이기적인 위계 구조와 자본주의적 가치 구조가 그대로 꽃들에게도 전이된다는 사실이 새삼 슬펐다. 장미나 튤립, 백합, 국화 등은 고가의 꽃이고 비싸게 돈을 주고 산 장미 한 다발을 선물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선물이 되지만, 반대로 이름 없는 들꽃은 사고 파는 행위 자체도 없으며 들꽃을 한 묶음 선물받는 것과 장미꽃 한다발 선물받는 것과는 동일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깊이 공감된다.
가끔은 예쁜 꽃 한다발이 그리워지고, 곁에 두고 보고 싶어지는 순간에 나는 어김 없이 꽃집으로 달려가게 되겠지만 전보다는 더 많이 이름 모를 들풀과 그 속에서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는 들꽃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