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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핑거 Feb 02. 2023

남편 씹는 거 아님 주의

그래서 아이패드는 물 건너 갔다고 한다.


늘 검정롱패딩, 그레이 자켓 같이 어두운 옷을 입고 시커멓게 나타나며 현관 중문을 열어대는 남편은 평소와 똑같이 새카맣다. “왔어?” 하고 형식적으로 눈이라도 한번 맞춰주려 노력하는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역시나 새카만 남편의 모습 속에서 평소와 다르게  하얗고 발그레한 무언가가 반짝인다.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내가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안고 퇴근하는 남편의 모습은 기대하지 못했던 모습이었기에 무척 놀라고 기뻤다. 하얀 꽃 사이에 수줍게 아름다운 자태를 숨기고 있는 예쁜 작약꽃 몽오리를 보자 나도 모르게 막 웃음이 났다. 이상하다. 입이 자꾸 귀꼬리로 어색하게 올라간다. 나는 갑자기 기분좋아 웃을 일이 그리도 없었나보다.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간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싶었다. 주체하지 못하게 좋아서 입에 걸리는 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연애할 때는 이벤트쟁이였던 남편의 모습을 새삼 잊고있었다. 꽃을 좋아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세뇌를 시켜도 기념일에 꽃 한송이 보고 싶어서 사다달라고 부탁하면 싫은 내색을 있는 대로 하는 남편을 보며 내심 서운했다. 그런 남편이,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알면서도 그 아내에게 꽃을 사주는 것 조차 인색한 남편이 가끔 이렇게 사다 안겨주는 꽃다발은 정말 기분 좋다. 생각해보니 인색하니까 기분 좋은 것 같다. 매번 안겨주고, 원할 때마다 안겨주면 식상해질 것도 같다. 이 남자 알고보니 나쁜 남자, 밀당의 고수였구나.





그렇게 인색한 남편은 내 감성을 여전히 끄고 다닌다. 내 감성은 간접무드등을 밝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전에 브런치 글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전했는데 도 그런다. 내 브런치의 열열 구독자이신 남편에게 ‘내 감성 끄지 마시라.’ 고 마음을 전하고 나면 안 건드릴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내가 밝힌 간접등을 부지런히 끄고 다닌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며..







그런 남편이 건네주는 꽃 한다발이 참 좋다.

마침 시들어있는 꽃을 빼고 화병을 닦고 차가운 물을 담아 여리고 예쁜 꽃들을 조심조심 꽂아놓고는 감성이 충만해진다. 남편이 꽃다발을 사온 이유는 두둑히 나온 보너스 때문이였다. 생각보다 많은 보너스를 받았다. 보너스가 나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는 내심 그 보너스 중에 일부로 내 아이패드나 맥북이 결재되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통장에 꽂힌 두둑한 목돈을 좀더 값지게 쓰고 싶다고 하신다. 암요. 알뜰하고 절약정신이 투철한 남편이기에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소비하고 흔적도 없이 돈이 사라지게 하는 마법을 지니고 있어 늘 죄인처럼 미안한 나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남편이 그 돈으로 내가 원하는 고가의 노트북을 사준다고 해도 어차피 그 돈이 내돈이고 내 돈이 그 돈이다.






당연히 사줄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살짝 서운할 뻔 했지만 내 감정보다 팩트에 집중해보려 애 썼다. 서운한 것은 일개 사소한 내 감정이고 팩트는 ‘남편은 보너스를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재테크하기를 원하는 것’ 이다. 전에는 이런 팩트보다 내 소소한 감정에 집중하느라 남편과 많이도 다투었다.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의 남편을 받아들이고 서운하지 않는 마음까지도 챙기며 나를 돌아보는 것이 가능한 내 자신이 새삼 기특했다.












그래.

작가님들이 하나같이 조언해주었다. 아이패드는 실상 유용하지 않다고. 아이패드보다는 맥북으로 눈을 돌렸다. 가질 수 없다면 나에게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 나에게 있는 구식노트북은 아직 자판도 잘 두드려지고 저장도 충실하게 잘 해내고 있다. 이러다가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릴까봐 그게 조금 두려울 뿐 아무 문제 없다. 사실 가장 큰 문제일 수도.. .후.






어쨌든 잘 지나갔다.

전 같았으면 몇일 간 삭막한 냉기를 띄우며 조용히 일인시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변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조금씩 변했고 계속 변해간다. 나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서 진정어린 나를 만났고 계속해서 나를 돌아보고 다독여주고 있다. 그렇게 나를 온전히 알고 받아들이고 나니 타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전에 없던 여유가 자라났다.







나는 이제 남편에게 조금 덜 서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 것이 있어도 ‘이유가 있겠지.’ 헤아리게 되었다. 몇번씩 곱씹으며 내 마음이 괜찮아질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하지만 타인을 비로소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게 되자 나는 삶이 더 편안해졌다.




남편에게 낮에 다정한 메신저가 왔다.



“소고기가 좀 괜찮아 보여서 샀어요.

내일 도착입니다.

나는 내일 약속이 있으니까 애들하고 맛나게 드세요.“




오.

통장에 잔고가 두둑히 있는 남편에게서 소고기 선물도 받아본다. 그동안은 잔고가 없어 나에게 꽃 한다발 사주기도 아까웠던 남편이 새삼 불쌍해진다.




둘째 생일날 아이가 좋아하는 갈비집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시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식사를 하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여보가 쏴.“


아무말도 안 한다.

이렇게 야금야금 쓰다가는 내 맥북 사줄 돈까지 다 써버리는 거 아니니?


여기까지만! 일 남편의 계획적이고 치밀한 모습까지도 나는 사랑한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 남편!

남의 편 말고 평생 내편 되어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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