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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핑거 May 25. 2023

맛 없는 미역국 앞에서

(주부에세이)



맛있어보이는 국거리용 소고기를 사다놓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꽝꽝 얼어버렸다. 기분좋게 새벽 5시에 일어나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며 미역국을 끓이려고 고기를 꺼내어보니 그렇다. 해동할 시간이 차마 없어서 살짝만 녹이고는 그냥 미역과 함께 볶아서 끓여냈다. 맙소사. 참기름도 똑 떨어졌다. 탈탈 털어넣어보아도 역부족이다. 참기름 넉넉히 두르고 고기 달달 볶고 미역 달달 볶아 끓여낸 미역국은 간장과 소금만 조금 더 두르면 얼마나 맛있는지. 그런데 고기는 꽝꽝 얼어있고 심지어 참기름도 없다. 오늘 미역국은 완전 망했다.





그래도 아침 한끼니, 적당히 떼우자 싶어 바글바글 끓여냈는데 물 조절도 실패다. 한강이 되어버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미역국은 꽝꽝 얼어있는 고기를 발견한 순간 깔끔하게 포기했어야 했던 것이다. 대충 끓여도 맛 없을수가 없는 미역국에서 아무 맛도 안난다. 고기의 풍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참기름의 고소함이 얼마나 큰 시너지를 내주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안 그래도 미역국을 안 좋아하는 큰 아이가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궁시렁궁시렁 계속 투덜댄다. 큰 아이만 빼고 동생들 둘은 다 좋아하는 미역국이기에 자주 끓여먹기만 하지만 큰 아이 눈치가 보여 그나마 절제하는 편인데, 어쩌다 한 번씩 끓여먹는 미역국 냄새만 맡아도 실망하며 투덜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참 밉다. 요즘 사춘기인지 별거 아닌 거에도 가끔씩 짜증을 곤두세우는 아이랑 수시로 스파이크 불꽃을 튀기곤 한다.  아이가 사춘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께 욱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가 짜증을 내고 있을 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안 그래도 싫어하는 미역국인데 너무 맛없게 끓여져서 계속 투덜투덜이다. 2차, 3차, 4차전까지 계속 하는 아이를 모른척 하며 미역국을 뚝딱 먹었다. 사실 이건 사춘기가 굳이 아니여도 충분히 짜증을 낼 수 있는 상황. 짜증나는 아이와 함께 짜증을 부리면 아이는 더 화가 날 테지. 짜증나는 네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쓰며 대꾸를 하지 않으니 오늘은 스파이크가 튀지 않았다.






미역국을 반만 먹게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크래미랑 바나나로 남은 허기를 채워 보냈다. 싫어하는 미역국먹기를 그만 두고 좋아하는 크래미를 먹으며 조금 기분이 좋아진 큰 아이와 테이블 건너편에 마주 앉아, 막내가 음악에 맞춰 피우는 재롱잔치 한 바탕에 다 함께 웃음을 터뜨리다 보니, 어느새 맛 없는 미역국과 투덜거렸던 미운 아이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세 아이들 모두 기분좋게 학교에 등원했다.

나는 집안 정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며 한 끼 더 먹을 수 있는 맛 없는 미역국을 과감하게 버리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미역국이 냉장고를 향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결국 내 입으로 들어가겠지. 내 배속에라도 넣어 먹어치우는게 참 싫으면서도 매번 그런다. 이걸 확 버려?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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