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에세이) 공부하는 엄마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이 있다.
그 성공은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누구의 성공이 이렇듯 가장 견디기 힘들고 불안과 불화의 원천이 된단 말인가.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우리는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 나와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동시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쾌적한 집에 살면서도, 안정된 조건 속에서 평온하게, 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으면서도, 경솔하게 나간 동창회나 모임에서 옛 친구 몇 명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나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견디기 가장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나 이웃의 성공인 것이다.
‘친척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말이 허사가 아니였고, 좋은 일이 생기면 누가 시샘하고 질투할까봐 쉬쉬하며 떠벌리지 않으셨던 시어머님의 지혜가 빛이 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나와 친한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없는 것이 맞다. 한 편으로는 안도감이 생긴다. 나만 그리 추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친한 친구의 성공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증오와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나니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인 솔즈베리 존은 [여러 정치가들] 에서 사회를 신체에 비유했다. 통치자는 머리, 의회는 심장, 법원은 허리, 관리와 판사는 눈과 귀와 혀가 되고, 재무담당자들은 배와 내장이 되고, 군대는 손이 되며 농민과 노동자는 발이 되는 것이다. 신체가 각 기능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 처럼 사회가 이처럼 구성되어 있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당시 ‘발’에 위치하고 있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정부의 일에 대해 발언을 한다는 일은, 발가락이 눈이 되는 것 만큼이나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에 이의가 없었다. 그저 신이 정해준 불가피한 고난이었고, 열등한 그들의 처지 또한 자연질서의 결과라고 여겼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평등주의적인 방향으로 정치적 사고의 반란이 일기 시작했고, 1776년 미국독립전쟁을 바탕으로 불평등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와 함께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니 이제 좀 살만해져야 하는데, 이상하다. 전 보다 더 힘들어졌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괴로워하게 되었으니, 풍요롭게 살면서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삶을 살면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오히려 불평등한 삶을 살고 있을 때에는, 불평등한 것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는데, 모든 것이 평등해지고나니 약간의 차이라도 금새 눈에 띄고 만다. 만족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19세기 초, 서양의 서점들은 자수성가한 영웅들의 자서전을 총동원하여 아직 자수성가하지 못한 사람들을 맹공격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을 통해 부족함을 개선할 수 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엄청난 부와 행운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들로 말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에서 프랭클린의 자기 개선의 삶과 그 삶에서 끌어낸 어록을 남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지혜로워진다.”
“노력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성공담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은 변화와 성장을 꿈꾸게 되었고, 이런 경향과 출판시장의 경향도 지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열되고 있는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들고 나와 온 세상을 향해 부추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고.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특별한 노력과 동시에 약간의 운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으련만, 가련한 우리는 그저 ‘성공한 모습’에만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앤서니 로빈슨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도 동일한 맥락이다. 이 잠든 거인을 앤서니 로빈슨을 통해 알게 되고 간절히 찾고 만나게 된 사람들이 펴내는 책이 현재 쏟아져나오고 있는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는 불행한 환경에서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거뭐지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 당신 안에도 이런 거인이 있다고! 깨우라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고!]
[역행자]의 자청이 생각난다. 완벽하게 닮아있다. ‘자청’은 우리나라에 ‘앤서니로빈슨’이었다.
우리는 그의 모범을 따를 수 있고 흉내낼 수 있다. 그러면서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크게 좌절할 수도 있다.
잠시 장-자크 루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절제하는 것.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이 더 끌린다.
방법도 간단하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 들을 내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는 삶. 부자가 되는 것 보다 훨씬 쉽고 간결하고 평화롭지 않은가.
빛의 속도로 발전한 사회는 전 보다 높은 소득을 제공해주었고, 우리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지만, 오히려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오히려 만족할 수 없고, 도대체 끝이라는 것이 없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더 큰 성공과 부를 열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좇는 삶이 유익이라고, 그 길이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구역질이 난다. 그렇게 살라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그게 행복이라고, 그게 세상을 사는 가치라고 외쳐대는 세상의 거짓 속임수에 놀아나며 자신의 영혼을 혹사시키고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괴롭히는 속삭임에 더 쉽게 넘어가는 가련한 존재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루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루소는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배를 채울 과일 몇 알과 견과가 있고, 저녁에 ‘어설픈 악기’를 연주하거나 ‘날카로운 돌을 사용하여 낚시용 카누’를 만들 수 있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원시인의 삶과 행복을 가지고 비교하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던 그 때, 그 삶이 더 단순하고 평화롭지 않았을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데이빗 소로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윌든]의 호숫가를 거닐며 원시시절로 직접 돌아가 그 삶을 살았던 증거가 [월든]에 기록되어 있다.
호수가에 직접 집을 짓고, 밭을 직접 일구고, 자신이 먹을 양만 소확하며 하루하루 배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나간 철학과 일치한다.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 받고 세뇌당하고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 학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참해질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불안/ 알랭 드 보통) 의 *평등,기대,선망* 편을 바탕으로 인용, 적용하고 그대로 옮기기도 하면서 느낀 것을 한 바닥으로 정리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