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한여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

by 퍼퓸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지은 지 15년 이상 된 아파트 단지마다 건물 외벽 도색이 한창이다. 아파트 도색이 시작되자 현관문만 열면 독한 페인트 냄새가 가득하다. 하교 후 공부방으로 오는 학생들마다 페인트 냄새로 괴로움을 호소한다.


“쌤, 코가 썩어요.”

“으으 냄새 때문에 암 걸릴 거 같아요.”

“냄새가 토 나와요.”


외벽을 도색할 때는 몰랐는데 내부 도색을 시작하니 현관문을 열 때마다 집 안으로 스며드는 냄새로 머리가 아프다. 도색이라는 것이 한 번씩 칠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집 안 내부를 도배할 때 초벌 도배 후 정식 도배를 하는 것처럼 도색에도 초벌 도색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처음 도색할 때는 신나 냄새가 지독하더니 마무리하는 도색은 그 냄새가 사람의 뇌신경을 찌르는 듯한 독한 화학 물질 냄새가 났다. 아스팔트를 깔 때 나는 냄새와 페인트 냄새가 뒤섞인 듯한 냄새다. 그 냄새가 본능적으로 건강에 해롭다는 신호를 보내니 코가 썩고 암이 걸릴 듯하고 토할 것 같다는 아이들의 표현이 귀에 쏙 박힌다.


냄새도 괴롭지만 아파트 외벽과 내부 색깔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학생들의 적나라한 표현 방식을 따라 하자면 주변 아파트를 볼 때마다 내 눈이 썩을 것 같다. 냄새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냄새가 안 나지만 아파트 외벽 색들은 앞으로 10년 이상은 변할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3~4년 전부터인가 근처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색깔이 심상치 않았다. 이전까지는 아파트 외벽 색상이 파스텔 계통의 색으로 밝은 살구색이나 민트, 핑크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아파트 색이 회색 톤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신축 아파트부터 변하던 외벽 색이 내가 사는 구축 아파트 주변까지 변하는 걸 볼 때는 외벽 색만 그러려니 했다. 직접 도색 과정을 살펴보니 집 현관만 빼고 아파트 내부의 모든 색을 외벽색과 비슷한 톤으로 바꾸었다. 현관문만 열면 고약한 페인트 냄새와 짙은 회색이 집안으로 침입할 것 같다. 뭔가 그동안 유행하던 밝은 파스텔 톤 색상에 검은색 물감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것 같은 색상들이다. 붉거나 푸르거나 모든 색상에서 검은빛이 돈다. 건물 전체가 옅은 회색 바탕에 검은빛이 감도는 초록이나 파랑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다 비슷하게 변하더니 드디어 내가 사는 아파트도 도색 중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불길한 사건의 전조를 나타내기 위해 전체 배경색이 종이에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번지는 것처럼 주변의 색들이 점진적으로 번져가다 내가 사는 곳까지 스며들었다. 짙은 회색 페인트가 꿈틀거리듯 내 주변까지 도달하여 나의 문 앞 아니 내 코앞까지 엄습한 느낌이다.


후각은 금방 피로해져서 지속적인 냄새에는 무뎌진다. 그러니 공기 중으로 냄새도 날아가고 후각도 피로해져서 도색으로 인한 냄새의 고통은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아파트 외벽 색깔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음울한 그림자부터 가벼운 색조까지 회색은 형상에 깊이와 섬세함을 부여하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회색은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듯한 산업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좋든 싫든 이런 회색이 일상의 팔레트 한 부분을 차지할 때가 많다. 그런 예는 알루미늄 계단부터 브루탈리즘의 영향을 받고 콘크리트 고가 도로까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대의 색 사용과 이론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재료들이 탈공업화해, 오늘날 더 자연친화적인 팔레트가 되었다는 점이다.” <컬러의 일>. 로라 페리먼

가뜩이나 아파트 자체가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인공물인데 색깔마저 어두운 회색톤에 파랑과 초록에도 검은빛이 도는 색이니 그 칙칙함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묶어두었던 우울감마저 스며 나오는 듯하다. 도시의 황량한 이미지에 아파트까지 콘크리트 느낌이 그대로 드러나는 진회색으로 칠해 놓으니 눈을 뜨면 하늘만 쳐다보며 살고 싶을 정도로 온통 잿빛이다. 주변 풀과 나무들까지 싱그러웠던 초록빛을 벗어버린 이 한 겨울, 주변의 색을 볼 때마다 어디선가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시멘트 가루 폭풍이 몰려올 듯하다.


그러던 중 남편에게 아파트 색에 대한 나의 의견을 얘기했더니 남편은 오히려 회색이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어 좋다고 한다. 게다가 건물이 깔끔해 보인다고 하니 아파트 색에 대한 생각은 내 취향 문제이고 내 기분 탓이란 말인가. 뭔가 내 편을 찾고 싶어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색 관련 서적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파트 도색과 관련된 정보를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니 2009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아파트들은 옅은 회색이나 하늘색이 주를 이루다가 2009년 이후부터 점차 채도가 높은 밝은 색, 그중에서도 주황색 계열의 색상으로 포인트를 주는 아파트 도색이 유행했다고 한다. 불과 10여 년 동안 채도가 높은 주황색 계열 색상에 익숙해져 마치 이전의 모든 아파트 색상이 주황색 계열인 듯 착각했다. 유행이 지나면서 2019년도에는 밝은 푸른색 계열에서 점차 어두워지면서 푸른색에 무채색의 회색이 가미되고 이후 더 어두워지면서 최근의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채도가 낮은 어두운 푸른색과 조화를 이루는 짙은 회색에 대해 우울해 보인다는 극소수의 표현 외에 대부분 ‘차갑고 도시적인 분위기’가 ‘깔끔하다’, ‘세련되고 고급스럽다’는 표현이 많았다. 오히려 이전의 밝은 파스텔톤이 촌스럽다는 글도 있고 ‘다크가 대세’라는 표현도 있었다.


게다가 색채심리 책을 찾아보니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나타나 회색에 대한 내 편을 몽땅 빼앗긴 것처럼 뭔가 서운했다. 색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는 회색을 진하거나 흐린 정도로만 구별할 뿐이었는데, 이런저런 정보를 찾으면서 색 전문가들에게는 회색도 종류가 많고 질감에 따른 느낌도 다양함을 알게 되었다. 실버, 알루미늄, 엘토스트래터스, 콘크리트, 슬래그, 차콜, 페인스 그레이 또는 다크 그레이 등 내 시각 능력으로는 세세하게 구별하기 힘든 다양한 회색이 많은 삶의 현장에서 쓰이고 있었다.


“회색 - 쓸쓸함, 수수함, 보편적 – 처음에는 탁하고 수수한 인상을 줄지 몰라도 회색 계열은 조용하고 중립적인 느낌과 평온함을 전달한다. 진한 중성색보다 덜 강하므로 복잡한 세상에서 현대적인 기본색이 되었다.” <같은 책>, 39p.

회색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니 즐겨 입은 옷도 회색이 많았음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회색 코트, 회색 티셔츠, 회색 후드티, 심지어 검은 양말이나 흰 양말보다 회색 양말이 많다. 회색 빛깔의 옷을 고를 때의 기억을 더듬으니 튀지 않는 무난함 때문이었다. 색 전문가가 말한 바로 그 ‘조용하고 중립적인 느낌과 평온함’ 때문에 회색 옷을 선호했다. 아파트 외벽이 짙은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에 불만을 터트렸던 나 자신도 실은 회색의 보편적 이미지에 따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 도심 속 삶의 휴식 공간인 아파트의 외벽을 ‘조용하고 중립적인 느낌과 평온함’을 나타내는 회색톤으로 바뀐 것에 대해 터뜨린 불만은 회색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뜬금없는 일로 보였으리라. 마침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든 시기에 도색이 이루어졌고 아파트 도색 당시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지독한 화학약품 냄새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1년 중 늦가을에서 겨울까지의 계절을 좋아했다. 짙은 회색으로 변해버린 아파트 외벽을 보니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 벌써 한여름의 색이 그립고 기다려진다. 회색이 아무리 평안함을 주고 도시의 세련미를 끌어올린다 해도 화사한 파스텔톤 색들이 더 좋은 건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한여름 속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냄새와 색들이 독한 페인트 냄새와 짙은 회색에 어떤 마법을 부려주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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