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다들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운전할 때 터널이 계속 나오면 운전할 때 피로도가 쌓여 갑갑함을 느끼고 평상시보다 졸음이 더 심해지는 증후군이다. 심지어 터널이 너무 길어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무지개 불빛이 나오는 터널에서는 착시 현상까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연쇄 터널 증후군’이 심해지는 도로가 있다. 수원 광명 고속도로, 용인서울 고속도로 양방향, 춘천 양양 고속도로, 서울 도심에는 대표적으로 내부순환로 중 정릉에서 시작하는 정릉터널과 바로 뒤이은 홍지문 터널이다. 최근 우연히 가본 관악터널(4,834m)도 만만치 않은데 잠정 연기된 봉천 터널이 개통되지 않더라도 4km가 넘는 길이로 말미암아 여기 또한 연쇄터널증후군이 심해지는 터널로 분류한다.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 2~3년 동안은 정릉 내부순환 타는 것이 곤욕스러웠다. 특히나 차량 정체가 심할 때는 폐쇄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증세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터널만 나오면 늘 긴장을 하게 된다.
신혼여행 때였다. IMF가 터져 유럽여행계획이 무산되었다. 억지로 가고자 하면 갈 수도 있겠지만 다녀온 뒤 경제적인 부분을 감당할 수 없어서 국내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주버님이 빌려주신 차로 서해안에서 남해한 동해안으로 일주일간 돌게 되었다. 당시는 내비게이션이 없었기에 남편은 운전을 하고 보조석에 있던 나는 전국지도책을 펴서 가는 길을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지도를 잘못 보고 이정표를 잘못 이해해 빠른 길로 가지 못하고 멀리멀리 돌아가느라 예상치 못했던 낯선 곳에 가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던지 내비게이션을 켜고 출발한다. 지시하는 데로 가기 때문에 지시를 잘 따르기만 하면 정확한 시간 안에 헤매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
3년 전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여행을 갈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강원도 강릉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가는데 빠른 길이라며 11km나 되는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연쇄 터널로 생각보다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가는 동안 주변을 볼 수 없었다. 터널이 너무 길어 무지갯빛 불이 번쩍이는 곳을 여러 차례 지나가면서 갑갑함 마저 느꼈고 숨을 돌릴 겸 일부러 보이는 휴게소는 다 들렀던 기억이 있다.
휴게소에 도착할 때마다 마치 참고 있던 숨을 몰아 쉬는 것처럼 갑갑함을 해소하는데 급급했다. 오랫동안 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햇볕을 본 지하인처럼 느껴졌다. 내비게이션이 빠르다고 알려준 길이 오히려 휴게소를 들르느라 빠른 길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득 20대와 30대에 지나갔던 한계령, 대관령, 미시령을 떠올렸다. 보통 갈 때는 한계령 올 때는 미시령, 아님 대관령에서 한계령으로 고개를 넘으면서 자연을 즐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니 빠른 길이라며 안내받은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이었으니 강원도 가는 길 내내 당혹스러웠다.
업무나 그 외 다른 일들로 빨리 가야 할 경우에는 터널로 뚫린 길이 효율적일 수 있겠으나 여행을 위한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여행은 도착지에서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가는 과정도 의미가 꽤 크기 때문이다. 결국 오는 길에는 멀리 미시령으로 돌아서 주변 경치를 즐기면서 왔다.
예전에는 미시령을 넘어갈 때 차들의 행렬로 마주 오는 차를 살피면서 앞 차를 조심스레 따라가곤 했다. 워낙 고도가 높고 길도 꼬불꼬불해서 운전이 쉽지 않은 길이지만 구름이 걸쳐 있는 길을 지나가면 자연이 내게 무슨 말이라도 걸 것 같았고, 그 길을 따라가면 어딘가에 다른 차원의 문이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새로 생긴 '연쇄 터널 길'로 미시령 길이 한적해져, 뒤 따라오는 차에 신경 쓰지 않고 도심의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공기를 마시면서 천천히 고갯길을 지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어 존폐위기에 놓인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휴게소를 보고 나니 앞으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가지 않는 길이 나중에는 갈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그 먹먹한 마음에 무거운 돌덩어리 하나가 더 얹히는 것 같았다.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다녀야 길이 되니, 사람이 다니지 않으면 길이 아니게 되어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 연휴가 길어 자칭 20대 가족이 모여 오랜만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여행을 계획했다. 남편과 내가 20대에 여행했던 것처럼 중간중간 가고 싶은 곳을 들르되 종착지까지 가고 오는 동안 내비게이션을 끄고 이정표만 보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그때처럼 숙박시설 예약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과 나, 딸과 아들 각자 가고 싶은 장소를 한 군데씩만 정하고 거리상 가까운 순서대로 가보기로 했다.
20대 당시 둘이서만 갈 때도 좌로 갈지 우로 갈지 티격태격했는데 이젠 4명이 가니 살짝 걱정스럽긴 하다.
그러나 자칭 20대라고 선언했으니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 이 정도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계속)
인생은 멀리 바라보는 항해와 같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이라는 항해를 제대로 하려면 상상력을 마음껏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대답을 해보면 상상력을 활용할 수 있다. 이미 사람들이 지나간 고속도로를 그대로 가지 말고 나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