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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Oct 05. 2023

누가 운전대를 잡을 것인가

추석 당일 친정집에서 그릇을 깼다. 

친정어머니가 동생 그릇을 사용한 후 돌려주려고 잘 보관했던 비싼 유리 접시였다. 며칠 전에도 그릇을 꺼내다 떨어뜨려 접시 하나를 깼다. 


나는 보통의 가정주부처럼 집 안 살림을 예쁘고 깔끔하게 잘하지 못한다. 그러니 집 안 일에 대해서는 필요한 살림을 알뜰살뜰 정성껏 잘하기 위해 신경 쓰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꼭 해야 하는 일만 하기로 했다. 예쁜 그릇에도 관심이 없고 설거지도 정리도 다 귀찮을 뿐이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일반 물건 다루듯 하니 남들보다 자주 깰 수밖에. 이런 내가 익숙한 남편은 평소엔 잘 놀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명절날 아침에 그릇을 깬 사건은 친정어머니와 남편에게 다른 의미였다보다. 나의 조심성 없는 행동이 이번 가족 여행에서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수동적으로 조수석에 앉아 바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운전하면서 차와 함께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차를 운전을 할 때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 때가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동네에서만 반복해서 돌아야 했는데 매번 뭔지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자전거를 타고 길이 끝나는 곳까지 자유롭게 가고 싶었는데, 동네의 어느 경계까지 가다가 다시 자전거를 돌려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그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운전면허를 따고서도 멀리 가지는 못했다. 초창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이후에는 하는 일에 얽매여 선뜻 멀리 장거리 운전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서울에서 자취하는 딸에게 갈 때마다 고속도로와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며 드라이브 맛을 느끼는 게 다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장거리 드라이브를 할 기회가 생긴 거다.      


그래서 이번 가족 여행에서는 남편에게 교대로 운전하자고 했다. 2시간씩 교대로 운전하고 딸과 아들도 차 앞유리로 보이는 경치를 즐길 겸 내가 운전할 때는 딸이 앞자리에 앉고 남편이 운전할 때는 아들이 앞에 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당일 아침에 먼저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3시간이 지나도 운전대를 양보하지 않았다. 차가 막혀 시간이 늘어나니 고속도로 중간에 차를 세워 바꿀 수도 없는 그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출발하면서 내가 계속 규칙 얘기를 하고 남편과 농담 섞인 말투로 실랑이를 하자 운전면허도 없는 아들이 살짝 짜증이 난 듯 한마디 한다. 


“안 되겠어. 그냥 내가 운전할게”          


아무래도 여행 가는 첫날부터 티격태격하면 안 될 것 같아 휴게소에서 쉬는 타이밍을 노리기 위해 그때까지 참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남편 휴대폰으로 친정어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내게 운전대를 맡기지 말라는 얘기다. 추석날 아침에 그릇도 깨고 조심성도 없으니 절대로 운전대를 맡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남편은 나와 딸, 아들이 다 들으라며 전화를 일부러 스피커 폰으로 받았다. 그릇 좀 깼다고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남편은 자기편을 얻은 듯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 한다.           


“자, 다들 잘 들었지? 할머니께서 엄마는 운전대 잡지 말라고 한 거...”          


나이 드신 어른들은 그릇을 깨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걱정을 하신다, 깨진 그릇이 뭔가 불길한 일의 전조 증상이라고 믿으시는 거다. 일의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 복선으로 간주하여 그릇을 깨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약간의 일리가 있음은 나도 인정한다. 뭔가 그날 피곤하거나 다른 이유로 그릇을 깰 정도로 정신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할 때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평소에 그릇을 잘 깨지 않는 매우 조심성 있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얘기고, 나는 상황이 다르다. 난 그릇 다루는 일들이 늘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그릇을 자주 깨드렸던 것이고 우연히 추석날 한 번 더 깨뜨린 것뿐이지 않은가.            


운전석에도 앉지 못하고 딸 아들도 시야가 탁 트인 앞자리를 즐겨야 하기 때문에 조수석에도 앉지 못하니 차 안이 너무 답답했다.          


그렇다고 내가 고분고분 따르면서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다.           


첫 번째 여행지 군산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지리산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참고 있었다.           


지리산을 향해 가던 중 전방 25km에 휴게소가 있다는 안내 표지가 보였다 아침부터 5시간째 운전하던 남편도 슬슬 피곤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아 강력하게 따졌다.                    


“이번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나랑 교대해. 나도 여기까지 와서 운전도 못하고 앉아만 있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남편도 피곤했는지 휴게소에 도착하자 차 키를 내게 주었다.           


드디어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면허를 딴지 25년이나 되어도 집과 서울 경기 지역에서만 운전을 해봤지 먼 지방에서는 내 마음대로 운전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전부터 직접 운전하여 가고 싶었던 지리산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운전대를 잡자 가는 길이 달라졌다. 뒷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지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풍경으로 차를 몰고 달려가는 것이다.     


순천완주고속도로에서 구례 화엄사를 지나가는 길로 올라갔다. 산으로 접어들어 올라갈수록 길은 급경사와 급커브가 많았지만 서울 북악스카이웨이를 자주 다닌 터라 운전이 어렵진 않았다. 청량한 공기와 지리산의 산세에 매료되어 운전하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다행히 딸과 아들도 지리산 성삼재 휴게소까지 가는 내내 지리산 경관과 깨끗한 공기에 만족해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야생동물출몰주의를 나타내는 곰 그림과 뱀그림 표지판을 볼 때는 마치 지리산 사파리를 가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남편은 뒷자리에서 나를 감시하는 듯하다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더니 시암재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야 잠에서 깼다.           


시암재 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경치를 즐기고 바로 성삼재 휴게소로 갔다. 성삼재 휴게소에서는 차가 너무 많아 주차할 곳이 없어 반대편 뱀사골 계곡 가는 방향으로 바로 빠져나가야 했다. 노고단 정상까지 직접 걸어가지도 못했고 성삼재 휴게소에서도 머물지는 못했지만 차 밖으로 보이는 모든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조만간 단풍이 들 때 꼭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리산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가 사진도 찍고 계곡 경치를 즐기다 지리산 휴게소까지 내가 운전하고 이후 여수까지는 남편이 운전하였다.      


지리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내가 직접 운전한 것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남편도 지리산 운전 이후부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교대로 운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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