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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퓸 Sep 28. 2023

기억의 한계로 정신줄 놓은 부부 이야기

내일이 추석이라 이것저것 장 볼게 많은 데 마트에 사람이 너무 많다. 게다가 명절엔  주차하기도 쉽지 않아 빈자리를 찾기 위해 주차장 안을 돌아야 하고, 심지어 계산을 하기 위해서도 장시간 줄을 서야 한다. 혼자 주차를 하고 장을 보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남편에게 주차를 부탁하고, 계산할 때도 남편이 계산대에 줄을 서 주면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물건을 후다닥 가서 챙겨 올 수 있기 때문에 명절에는 남편과 함께 마트에 가곤 한다.   

 

오늘도 사람이 더 많아지기 전에 서둘러 가자며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명절이니 현금도 필요하여 은행 ATM 기기에 들르기 위해 지갑을 찾았는데 지갑을 두고 온 걸 마트 가는 차 안에서 확인했다. 현금카드를 지갑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으니 마트를 다녀와서 다시 은행을 가기로 했다. 그때 마침 남편이 자신의 스마트폰도 챙겨 오지 않았다고 하여 결국 집으로 다시 가기로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유턴을 받으려고 신호를 기다리는 데 가방 속 다른 주머니를 뒤지니 현금 카드가 나왔다. 결국 나는 은행 앞에서 내려 현금을 찾기로 하고 남편은 집으로 가서 스마트폰을 가져와 다시 은행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은행 ATM 지급기에서 현금을 찾고 은행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데 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었더니 그제야 주차장에서 출발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통화 후에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남편이 차를 몰고 은행 앞으로 왔다. 차의 조수석에 앉고 보니 컵 홀더에 집에서 뽑아두고 가져오지 못한 원두커피가 있었다. 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남편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남편은 핸드폰을 가지러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 후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가서 자신의 책상과 가방 등 어디를 뒤져도 스마트 폰을 찾지 못했다. 이럴 바에는 마트 가는 차 안에서 마시려고 핸드드립으로 뽑아둔  커피라도 챙기자며 컵에 따라 들고  차로 돌아왔는데 운전석 등받이에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는 얘기다.     


결국 둘 다 자신의 물건을 다 챙겼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는데 급하게 서두르다 정신줄을 놓고 만 것이다.   


마트로 가는 차 안에서 나와 남편은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지었다. 20대 초에 만나 평생 청춘으로 살 것 같았던 동갑내기 부부가 긴 세월을 함께 하고 나이를 먹어 50대가 되니 이런 웃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한다.      


내가 잊어버리기 전에 나와 남편의 정신줄 놓은 일을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하니 남편이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도 써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최근 빈번하게 있었던 ‘건망증’과 관련된 사건을 떠올리려 했지만 이 또한 기억력의 한계로 떠오르지 않았다. 겪었을 땐 황당하고 어이없어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았던 사건들이었는데 그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아 기록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안 되겠네, 기억이 나질 않아. 뭔가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치?”     


그러자 남편이 따뜻한 목소리로 오글거리는 대사를 툭 던진다.     


“괜찮아, 다 잊어도 우리 사랑만 기억하면 돼....그치?”     


들을 땐 오글거렸지만 그래도 듣고 나니 남편의 마음이 고맙다.  

이런 남편의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기록하는 데, 기록하다 보니 한 가지 대화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남편은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남편도 잘 기억을 못 한다. 나 역시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뭔가 기억력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우스개 얘기로 나눴던 것 같다.      


둘 다 나중에 늙어서 기억력이 몹시 떨어진 상황에 대한 상상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력이 몹시 좋지 않을 때 집에서 하루 종일 마주 보고 서로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길 또 하면 어쩌나, 서로 건강 챙겨 준다며 아침에 약 주고 잊어버리고 저녁에 또 주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어느 집이나 비슷하겠지만 나와 남편의 성격은 정반대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기억하는 분야와 남편이 기억하는 분야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사건이나 행동 중심으로 기억하는 편인데, 남편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의 세세한 감정적인 부분들을 잘 기억한다.      


그동안 나와 남편은 기억장치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지는 콕 집어 구별하지 못했었다. 글을 쓰다 보니 그 차이를 구분하게 되었다.     


남편은 주로 과거에 함께 했던 시간 동안 가졌던 감정과 감상을 섬세하게 기억하고 있고, 나는 세밀한 감정이나 감상보다는 사건과 행동 중심으로 기억을 한다. 그래서 남편이 과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또는 남편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할 때, 내가 나의 기억장치로 대신 기억해 준다는 말까지 했던 거다.   


남편은 가끔 과거의 어떤 시점에 내가 가졌던 마음의 상태를 묻는데, 미안하게도 당시의 나의 마음의 상태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떤 일들에 대한 기억뿐이고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 정도로 지극히 단순하다. 남편은 단순한 나에게 마치 소설가가 심리 묘사를 하듯 그때의 기억이 어땠는지를 물어보지만 내게는 가능하지 않은 기억의 영역이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남편의 기억은 로맨스 영화 같고 나의 기억은 액션 영화 같다.     


함께 했던 동일한 과거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을 하다 보니, 기억이 엇갈릴 때가 많아 누가 맞는지 따지다 말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니 나이가 더 들면 둘의 기억장치의 불일치로 더 싸우지 않을까 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웃었던 일화였다.      


이제 이틀 후에 가족과 함께 신혼여행으로 다녔던 곳을 내비게이션 없이 여행하고자 한다. 아빠를 닮은 딸과 엄마를 닮은 아들, 그리고 나와 남편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기억하겠지만, 가족과 함께 한 소중한 기억을 담는 여행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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