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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Nov 16. 2023

하루가 주는 의미

절대 가벼울 수 없는 깨우침

중학교 때 수업이 시작하기 전 미리 와 계신 사회 선생님이 나에게 막연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사니?"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이었고 당시에는 어린 나이였으니 인생을 뭘 얼마나 생각했겠냐만은 "나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어났으니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죠"라고 대답했더니 이제 막 태어나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하고 눈도 제대로 뜨기도 전에 세상을 말하고 있는 당찬 나의 모습에 기가 막혔는지 선생님이 그냥 "허허" 하고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겉으로야 어린 제자가 철없이 하는 말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네가 세상을 알아?"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에겐 하루라는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같은 듯 매일 다른 시간이 주어진다.

날마다 새로 시작하지만 늘 같은 느낌의 하루는 "자정에서 다음 날 자정까지의 24시간 동안"을 뜻한다.  


가끔씩 불공정이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들고일어나 조금은 불편해지기도 하는 이 세상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은 어떤 에누리도 없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공평(公平)하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이쁜 사람에게는 더 많이 할애해서 많이 주고 미운 사람에게는 조금만이라는 불합리한 차별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시간이지만 그래도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는 개인의 성향 그리고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어떤 이는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살면서 최선을 다해 하루를 꽉 찬 채로 바쁘게 보낼 것이고 또 누구는 어차피 똑같은 날들과 시간에 대한 지루함으로 불평을 늘어놓기만 할 뿐 대충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채로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트루먼쇼에 나오는 짐캐리가 매일 녹음기처럼 외쳐대는 "good morning, good afternoon and good evening..."의 아무런 의식 없는 듯한 인사가 갑자기 떠오른다.

사람을 만나면 입이 기억하고 별 뜻도 생각도 없이 무심코 내뱉는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무리까지 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이 지극히 평범한 하루 그래서 때로 싫증도 나고 잘 만들어진 기계처럼 얄미우리만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한반복 된다는 것이 대견하고 신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겹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던 시간들.


아직은 젊음이 머물러 있을 때만 해도 그 긴(?) 하루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를 고민한 적이 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뭘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당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철이 들어가면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많은 일들로 삶에 대한 생각들이 많아지다 보니 권리가 아닌 의무처럼 주어진 하루를 보내는 일이 너무 버겁고 길게만 느껴져서 힘들어했던 적도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보내는 하루라는 시간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더디게만 가는 게 조바심이 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를 한 번쯤은 되뇌어 봤을 어린 시절과는 달리 단거리 육상 선수가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앞으로 튕겨 나아가듯 뭐가 그리도 급한지 총알같이 달려간다.

가속까지 붙으면 속력이 어마어마하게 빨라져 빛의 속도까지 따라 마실 기세로 다가오며 체감되는 나이 못지않게 시간의 속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요즘의 내 하루는 아침과 밤이 공존하는 듯하다.

아침이 오면 어느새 저녁이 성큼 다가와 캄캄한 밤을 재촉한다.

소리도 없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이 똑똑한 삶의 순환은 "한 번만 더"라는 여지도 없고 반항은 불문율(不文律)인 채 무능함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무력감이 짓누르기라도 하면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영원할 것 같던 나의 파릇파릇했던 리즈( Leeds ) 시절의 젊음은 온데간데없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런 시간의 딜 없는 속성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든 하루를 빨리 보내느라 땀 빼면서 재촉하지도 말고 매일을 좀 더 여유롭게 때로는 일탈(逸脫, deviance)을 즐겨보기도 하면서 살아볼 걸 그랬나 보다.

그런 재미도 하나 없이 하지 말라면 안 하고 하라는 것만 하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바른생활로만 살아온 답답한 세월이 그야말로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피에로 분장이라도 해서 기꺼이 처음인 것들로 새로운 이벤트를 벌여주고 있는데도 우리는 익숙함이 주는 강한 중독성 때문에 그 심오한 뜻을 간과한 채 늘 같은 날, 같은 일들뿐이라고 입을 삐쭉이면서 퉁퉁 거리며 살아간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무료하고 따분했던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가장 안온(安穩)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알면서도 무시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살아간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장편소설 페스트(La Peste)에서 읽었던 끔찍한 내용이 소설이 아닌 실제상황으로 우리 앞에 닥쳐오니 아무리 최첨단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지금이라도 오랜 시간 애써 일궈놓은 모든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지루할 정도로 편안하던 세상도 더 이상은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한다.


기둥 없이 춤추는 풍선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다 위태위태 너덜너덜 다 헤집어지고 나서 겨우 다다른 곳이 막다른 길이거나 천길 낭떠러지인 듯한 극심한 공포와 위기감을 느끼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에서의 하루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고 다잡아 보게도 된다.


큰 탈 없는 한가로움으로 지겹다 말하던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어쩌면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절대 가벼울 수 없는 그 묵직한 깨우침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을 것이다.

그 기준이야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험난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살아남기 위해 대충 살아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우리의 삶은 뭔가를 이루어 냈어야 하고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야 마땅하다. 

적어도 어제보다 오늘은 조금 더 화려하고 멋져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당연한 이치가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렇지 않다로 무산된다.

오히려 남들만 못한 것 같아 늘 죄 없는 나를 채찍질하면서 사느라 힘에 부친다.

그래도 이젠 어린아이처럼 지난(至難)하다 투정 부리면서 불만만 늘어놓진 말아야 할 것 같다.

평안함이 주는 안정감속에 살면서도 감사한 줄 모르고 퍼부어대는 우리의 밑도 끝도 없는 불평불만에 세상이 또 언제 어떤 식으로 심술부리며 성을 낼지 모르니까.


앞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하루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로 다가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지겨워지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그 크나 큰 의미를 또다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언제나 곁에서 함께 머물고 있는 작은 행복에게 상처 따위를 남기는 오류(誤謬)를 범하지도 않게 날마다 주어지는 오늘 하루의 소중함을 두 팔로 따뜻하게 끌어안고 선생님께 똑 부러지게 말하던 어릴 때의 그 마음처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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