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날이 밝았는데도 밖이 어두운 것 같다.
커튼은 걷고 내다보니 하늘에서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올 들어 첫눈이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어느새 지붕을 하얗게 감싸고 눈꽃을 예쁘게 피우고는 한 겨울 숲 속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음속에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기억들 때문인지 아니면 상업적 광고에 세뇌되어 버린 탓인지 괜스레 우리는 첫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감정도 나이가 드니 습기가 다해 메말라 가고 해마다 보는 익숙한 풍경이 낯설지 않아 이제는 별 감흥도 없긴 하지만 꿈 많던 사춘기 소녀일 때 "첫눈"이라는 단어는 왠지 듣기만 해도 설레었던 것 같다.
사실 그토록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첫눈의 실상은 상상 속 기대와는 상당히 어긋나게 별로인 경우가 많다.
커다란 전나무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깊은 산골 외딴 오두막집...
지붕은 밤새 내린 하얀 눈으로 멋진 모자를 만들어 덮어쓰고 벽에는 전통 사극에 나오는 힘 좋은 돌쇠(?)들이 마치 우렁각시처럼 어디선가 짜~안! 하고 나타나 두꺼운 근육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통나무를 하나하나 도끼로 내리쳐서 주인님 추운 겨울 내내 쓸 나무 땔감들을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고...
밖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함박눈이 펑펑 내려 요요(寥寥)한가운데 산타할아버지는 뜨거워서 어찌 들어가실꼬?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굴뚝에서는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우리가 그림 속에서나 보던 그런 운치 있는 모습의 풍경이 절대 아니다.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듯 조용히 낭만을 한껏 품고 내리는 눈이 아니라 진눈깨비에 가까운 그마저도 잠깐 오다가는 멈추어버려 이걸 첫눈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하고는 흔적 없이 사라져 서로 다른 지역에 살기라도 하면 그 조차도 공유할 수 없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집착하듯 첫눈을 기다리는 걸까?
첫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에 첫사랑이 그중 으뜸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 우리 집 안마당에는 해마다 봉선화(鳳仙花)가 피어 있었다.
꽃이 피면 그 꽃잎을 뜯어다가 돌로 짓이겨 열손가락 위에 얹어놓고는 행여 잠들어 뒤척이다 풀려버리면 물이 안 들까 비닐로 싸고 실로 꽁꽁 묶은 채 피가 안 통해 손가락이 근질근질 거리는 걸 참으며 하룻밤을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 제대로 물이 잘 들었나? 두근두근 비닐을 풀어보면 밤새 열일한 꽃즙덕으로 손톱에 뻘~건색으로 봉숭아물이 들어 있다.
예뻐진 손톱을 기대했지만 열심히 만들어 놓은 손가락은 이쁘기는커녕 처음에는 보기가 흉하다.
매니큐어를 바른 것마냥 손톱에만 빨간색으로 예쁘게 염색이 되어야 하는데 마치 고추장 단지에 여러 날 절구 었다가 꺼낸 "마늘종 고추장 절임"이 아닌 "손가락 고추장 절임"을 만들어 놓은 듯 손가락 주변에도 시뻘거니 물이 같이 들고 목욕탕에서 갓 나왔을 때처럼 쭈글거리기까지 색깔도 빨간색이 아닌 검은색에 가까운 검붉은 색?
게다가 골고루도 아니고 얼룩덜룩...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시간이 지나면서 손톱에도 손가락에도 제멋대로 물들었던 색들이 차츰 빠지면서 손톱에만 옅은 색으로 남게 되면 그제야 봉숭아 물이 빛을 발한다.
특히나 손톱이 자라면서 2/3 정도 남게 되면 그때가 제일 예쁘다.
"이 봉숭아 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찰떡 같이 믿고 혹시라도 첫사랑이 나타날까? 사춘기 어린 마음에 첫눈이 오기 전에 손톱의 색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했던 철부지 시절의 기억이 아련하다.
첫눈이 왔으니 곧 겨울도 깊어갈 것이다.
봉숭아물이니 첫사랑이니 그런 아름다운 낭만을 무자비하게 깨부수는 현실에서는 겨울이 오면 깊은 동면(冬眠)에 들어가기 전 뱃속을 비축해 놓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곰처럼 우리도 겨울나기를 위해 겨우내 먹거리(?)를 쌓아 월동준비를 해야 할 테다.
지금은 세상이 변해 겨울나기 가장 큰 숙제인 김장도 직접 하지 않고 사다 먹어도 될 만큼 편리하게 바뀌었지만 김장하는 날이면 늘 커다란 행사를 치르듯 집안이 분주했다.
인심 좋은 품앗이로 도와주고 받고 하는 동네 아줌마들을 위해 엄마가 준비한 삶은 돼지고기를 하얀 배추 고갱이에 얹어 놓고 시뻘건 무생채를 올린 다음 입사귀로 돌돌 말아 쌈을 싸 먹는 그 맛을 보기 위해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많이 먹으면 배 아프다"는 엄마의 말도 아랑곳 않고 입가에 뻘건 칠을 해가며 아구아구 열심히 먹던 이제는 보기 힘든 어린 날의 추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비와는 달리 눈은 일부러라도 맞고 싶어 어린 날엔 눈 오는 날을 더 기다렸는데...
이곳의 눈은 때로 이른 가을에도 뜬금없이 오기 시작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늦은 봄까지 내리기도 한다.
날씨도 춥다 보니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아니고 좁쌀만 한 크기의 싸라기눈이 내려 절대 쌓일 것 같지 않은데도 소복이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놓기도 한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겨울만 되면 워낙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살다 보니 "사랑하는 연인과 첫눈 오는 날 만나자"와 같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은커녕 도로가 엉망이 되고 차가 미끄러지는 아찔한 순간까지 선한 얼굴을 하고 포악한 심술을 부려대는 눈의 어이없는 이중적인 모습을 알아차리고 나니 이제는 눈 오는 게 지겨워지기도 한다.
첫눈이었는데도 무례하게 어느 해인가 9월에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에 심어진 키 큰 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단단하게 버티고 서있던 그 힘마저 눈의 무게에 눌려 무력하게 부러져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적이 있다.
집보다 높이 자랐던 나무들도 힘없이 무너지는데 겨우 꽃 피우기 시작하던 여린 우리 집 뒷마당의 사과나무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튼튼해 보였던 가운데 가지가 기억자를 만들어 땅을 향하고 있었다.
안~돼!... 이제껏 어떻게 키웠는데...
그날 놀란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탓으로 꽃 피우는 법을 잊은 사과나무는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스스로의 재활 치유의 노력으로 상처에서 벗어나 겨우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정작 내게 첫눈 오는 날의 기억은 중학교시절 도덕시간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교실에 문제가 생겨 남학생반과 합반했던 일?
그 마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할 뿐 별로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 아쉽긴 하다.
첫눈 하면 주로 사랑이야기들이 먼저 떠오르긴 한다.
연인이 없는 이들에게는 혹시라도 첫사랑을 이루게 해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이들은 그(그녀)와 첫눈이 내리는 날 자신들의 사랑이야기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추억을 만들고 그걸 또 남기고 싶어서...
이렇듯 첫눈이 각자에게 주는 의미들이야 물론 여러 가지로 많겠지만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사랑 말고도 첫눈 하면 어린 시절의 기억들로 괜히 설레기도 하고 그 특별한(?) 날에 그게 무엇이든 소망하던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저마다만의 이유를 품은 채 우리는 첫눈을 기다리고 있는 건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