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언저리에서
내 삶의 언저리에서 쭈욱 머물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가 가끔씩 아련하게 떠오르는 촌스럽고 순수했던 학창 시절의 추억, 가장 빛나던 내 젊은 날의 기억, 결혼을 하고 아이와 함께 웃고 울던 수많은 시간들.
눈으로 보고 있어도 별 감흥 없이 지나쳤던 풀 한 포기, 제 짝을 찾느라 목청껏 노래 부르면서 날갯짓하는 새들까지 우리 곁에서 존재의 유무를 알듯 모를 듯 함께 살아오고 있는 모든 것들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우리는 늘 보내고 맞이하면서 살아간다.
거르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한 해 한 해를, 같은 듯 다르게 왔다가는 계절을,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고
열심히 세던 숫자가 점점 가속(加速)이 붙어 뜻 모를 의미를 부여한 채 바뀌어 가는 나이를 그리고 실타래가 엉키듯 얼키설키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늘 온다 간다 말도 하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스쳐 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척, 의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안 한 채로 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겹다고 투덜대기만 하지 가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으니 잡아라 아무리 겁박을 해도 시도조차 않고 그냥 또 허무하게 보내버리고 만다.
해마다 봄이 가면 금세 겨울이 지난해의 가면을 뒤집어쓴 듯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고 오늘이 가면 내일이 일란성쌍둥이처럼 또 다른 오늘의 얼굴을 하고 다시 찾아온다.
분명 다른데도 다르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묵직한 의미 부여는 진즉에 잊은 채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익숙함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종이장만큼이나 얇디얇아 언제 찢어질지도 모르고 갈대처럼 갈팡질팡하기 일쑤인 우리의 나약한 속내가 사이비 종교의 교주에게 세뇌당한 듯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에 이끌리다 보면 "머엉~"해져 그저 가면 가는가 보다 오면 오는가 보다 하게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간악(奸惡)한 폭풍전야(暴風前夜)의 고요에 속아 아무런 의심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마그마의 임계점이 넘으면 화산이 폭발하듯이 부글부글 끓으며 서서히 쌓여가던 예견되지 않은 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뻥" 하고 터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넌지시 귀띔해 주며 미리 알려주려 애써봐도 도저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인내력이 바닥나 지쳐버린 세상은 한없이 나태해지려는 우리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막강한 파워를 뽐내며 무서운 경고를 내린다.
절대로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던 "펜더믹"이라는 공포 영화 같은 무시무시한 일을 떡하니 터트려 봄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니 준비되지 않은 우리는 우왕좌왕 허공으로 헛발질 해대며 길을 잃고 헤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민방위 훈련 하듯 주기적으로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공부하고 연습했어야 했는데.
바란 적도 없고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위기 상황에 온 사지가 노출되다 보니 생명의 위협은 물론이고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이제껏 교만했던 삶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편안해서 무관심했던 그때로 다시 한번 돌아가게 해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다급하게 애원하면서 회환(悔恨)을 토로해 보지만 이미 상처받을 때로 받고 토라져 가 버린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도 겪었던 상처와 슬픔들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조금씩 무뎌지게 된다.
마음속에 분노로 쌓여있던 격한 감정도 다른 연한 감정들과 뒤섞이다 보면 그 농도가 묽어져 점차 희석되어 간다.
깊은 노여움으로 철옹성을 세워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고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들이 서서히 누그러지면서 너그러워지기도 하고 도리어 고통스럽고 아팠던 그때를 돌아보며 미소까지 지을 수 있는
모순적 여유도 갖게 된다.
나이가 들면 조금은 유해지는 이유도 수없이 많은 고뇌(苦惱)와 번민(煩悶) 그리고 갈등 속에서 싸우고 극복하는 일들을 되풀이하면서 그 험난한 시간의 통로를 무사히 건너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나오는 찰나는 힘들어도 지나가면 다 추억으로 남는다.
가끔 오래된 낡은 수첩에서 사춘기 철없던 시절 끄적거려 놓았던 글들을 본다.
뭐가 그리 고민이었는지 어린 탓에 나름 꽤 심각했지만 세련되지 못하게 뒤죽박죽 어지럽혀져 있는 유치한 글귀들이 민망해서 입가에 실소(失笑)가 흐르고
카페가 없던 그 시절에 다방에서 아니면 어느 길거리의 허름한 레코드 가게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옛날 음악을 어쩌다 듣기라도 할라치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괜히 센티해지기도 한다.
오래된 서랍 안 구석에 내동댕이 쳐진 채 널브러져 있던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을 때도 무심코 걸어온 그 시절을 생각하게 된다.
머무는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할 수 있으니 아쉬워할 것도 없고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어 그리워할 것도 없다
모든 게 넘쳐나서 없는 것이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어 불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던 그 옛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고개를 돌리는 것은 이제는 볼 수가 없어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니 어떻게 해서든 잡고 실어서 일 것이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주워 담을수록 미래가 환하게 밝아와야 하는데 오히려 암흑같이 어두워 불안하고 사람손을 대신해 주는 기기들 덕에 삶이 여유로워져야 하는데 기계들에 치이지 않으려면 더 바쁘게 살아내야 하는 의무가 대신 등에 지어지게 되면서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발걸음이 무거워 급속히 변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따라가기도 숨이 차다.
그러다 보니 과거를 기웃기웃 동경하면서 되새김질하는 것도 디지털보다는 조금 더 천천히 움직였을 아날로그 감성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민첩하게 다가오는 속도에 밀려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잠깐이라도 머물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빈 틈을 타고 기어 나오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안타깝고 지나가니까 아릿한 미련도 아련한 그리움도 남는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