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커피와 모퉁이 찻집의 기억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

by 스몰토크

정말 오랜만에 친구와 명동에서 만나 학창 시절에 다니던 카페를 가보았다.

중국 대사관 뒤편에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 카페는 비엔나커피가 시그니처 메뉴이다.

비엔나커피는 쌉쌀한 커피 위에 구름이 연상될 정도로 하얗고 풍성한 크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시나몬가루를 살짝 뿌려줌으로써 그 향을 더한 커피다.

일반 커피에 비해 4~5배 정도가 비싸 대학생들이 용돈으로 사 먹기엔 많이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조금 특별했던 그곳의 커피를 먹어보겠다고 주말이면 친구들과 명동으로 몰려갔던 기억이 난다.


사실은 커피마니아가 아니라 맛은 잘 모르지만 딱히 그 커피 맛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커피잔에 평범하게 커피만 담겨있는 보통의 커피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몽실몽실 보드라운 크림이 하얀 눈처럼 소복이 올려져 있어 소담스럽고 비싼 만큼 고급스러워 보이는 듯한 커피를 들고 있으면 뭔가 있어 보일 것 같은 철없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신기한 물건을 보면 이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하듯 처음 마주한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먹는 커피인고?

그림 같기도 하고, 하나의 예술작품 같기도 한 커피 한잔을 들고 어떻게 마셔야 커피와 내가 하나가 되어 광고에 나오는 그림처럼 우아해 보일까? 요리조리 궁리를 하다가 크림과 커피가 섞이면 가게 주인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해 놓은 멋진 작품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오지랖 넓은 걱정까지 하면서 크림 먼저 한 스푼 입안으로 넣어본다.

마치 보들보들 촉촉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숨기기 위해 하얀 크림으로 덮어 놓았을 것 같은 비주얼과는 달리 은은한 시나몬 향이 풍기는 달콤한 크림을 한 술 한 술 떠먹다 보면 달달함 뒤에 더 크게 다가오는 쓰디쓴 맛이 입안의 혀를 마비시키는 바람에 밑에 숨어 있던 까만색 커피는 다 마시지도 못하고 그대로 남기곤 했다.

크림만 먹으려 그 비싼 커피를 시킨 꼴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40년이 훌쩍 넘어 버린 시간 동안 삶에 치여 반짝이던 젊은 날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 보니 덩달아 잊고 지내던 그곳에서의 기억이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옛 친구를 만나니 자연스레 다시금 생각이 난다.

오랜만에 일부러 찾아온 이곳에서 우리가 즐겨 찾던 비엔나커피를 한잔씩 시켜보지만 그때의 맛이 살아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집의 커피맛이 변해서가 아니다.

커피맛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지나간 시간과는 상관도 없이 기특할 만큼이나 그대로였다.

다만 우리가 변해 있었다.


누군가는 잊고 지내도, 기억해 주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함께 세상과 적잖이 타협해 버린 우리의 입맛이 변했고, 옛 추억을 더듬는 사치를 부릴 만큼의 풍부한 감성을 우리가 더 이상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우리는 변했어도 추억하는 모든 것들이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만 물은 흐르게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이다.


친구와 옛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이들은 눈에 띄지 않고 손님의 대부분이 우리 또래의 아줌마 아저씨들이다.

친구도 나도 서로 마주 보며 웃는다.

저들도 그 시절의 우리처럼 풋풋한 젊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이곳에 드나들었을 테지...

세월에 장사 없다고 희끗희끗 하얗게 센 머리와 웃을 때마다 자글자글 생기는 눈가의 실주름을 훈장처럼 지니고 있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 옛 친구를 앞세워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찾아왔을 테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웃음이 난다.


그때는 어땠고... 저랬고...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그들을 보니 이곳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던 또 다른 분위기의 찻집이 생각난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

모퉁이 찻집...


명동이라는 번화가의 화려함과는 달리 동네 어귀에 허름하게 자리 잡은 작은 찻집.

세상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움직여간 탓에 주변이 개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사라져 다시는 찾아갈 수도 없는 곳.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따뜻한 일요일 오후

미사가 끝나자 새내기 대학생이 되는 우리를 축하해 준다는 핑계로 청년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선배가 무작정 끌고 간 곳이 바로 모퉁이 찻집이다.

원래 모퉁이란 구부러지거나 꺾여 돌아간 자리 또는 변두리나 구석진 곳을 말한다.

우리가 뭣도 모르고 선배를 따라간 곳은 성당 근처에 있는 아담한 찻집이었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 지극히 평범한 아니 어쩌면 그 조차도 훨씬 못 미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그 이름이 주는 묘한 끌림이 있어 좋았다.


대학생의 특권인 듯 그 어느 곳도 고등학생은 절대 출입불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라고 가지 말라니 더 가보고 싶었던 커피숍...

이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 대학생이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 1순위로 손꼽았던 커피숍을 생애 처음으로 가게 되었을 때의 설렘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열했다.

나도 이런 곳을 드나들 만큼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밤 잠도 설쳐가며 힘겹게 달려온 시간들이 보상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마치 이 순간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처럼...


하지만 신출내기 후배 사랑으로 선배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고 우리를 이끈 곳은 내가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해 오던 멋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요즘처럼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지도 않았고, 널찍하지도, 모든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지도, 인테리어가 잘 꾸며져 있지도 않았다.

홍보도 귀찮다는 듯 후미진 곳에 있는 듯 없는 듯 티 나지 않게 소심한 불을 밝히고, 배짱 튕기듯 아는 이 들만 찾아와 잠시 쉬다 가라는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정말로 작은 찻집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간판하나 제대로 없다.

시멘트 담벼락에 삐뚤빼뚤, 마치 어린아이들이 분필로 낙서라도 해 놓은 듯 성의 없이 대충 써놓은 글씨.

원래 글씨를 못쓰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쓴 걸까?

손바닥만 한 크기의 창문틈으로 보일락 말락 어두운 불빛만 새어 나올 뿐, 조명등조차 없어 밤에는 그나마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

카페인지, 크나큰 범죄를 벌이는 소굴인지,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뭐 하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다.


무심하고 시크해 보이는 꾸안꾸의 인테리어가 오히려 카페 주인의 콘셉트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처럼 그 흔한 광고 하나 없는 이곳을 누가 어떻게 알고 찾아오라고 이런 곳에 숨은 듯 가게를 오픈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마도 선배 친구라는 카페 주인은 돈 벌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집안이 재벌이라서 돈 버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뒤를 이어야 한다고 옥죄는 회장님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자신의 공간에 친구들을 불러놓고 도란도란 살아가는 이야기만 배부르게 나누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혀 신경 쓴 기색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안에는 뭔가 색다른 게 있겠지 은근 기대는 해 본다.

힘만 한번 꽉~ 하고 주면 열쇠 없이도 바로 열릴 것 같은 누추한 문을 열고 선배가 앞장서면 우리가 그 뒤를 따른다.

천년의 시간을 지나 길고 긴 기다림이 만들어낸 동굴처럼 어두컴컴했지만 벽면에 군데군데 타다만 촛불이 아늑한 조명이 되어 그윽하게 내부를 밝히고 있다.

상상하던 대로 공간은 작았고, 웬만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천정은 낮았다.

커피를 올려놓을 만한 기본적인 테이블도 눈에 띄지 않는다.

벽이 등받이가 되도록 대충 붙여 연결해 놓은 나무 판때기 위에 무심코 던져 놓은 듯한 방석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위에 앉으면 그게 그냥 의자가 된다.

그나마 몇 안 되는 방석이 없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지쳐 하품만 하고 있는 듯 나른해 보인다.


다락방만큼이나 작은 이곳을 아는 이가 없으니 찾는 이도 없어 보인다.

5~6명만 차도 안이 꽉 차 풀하우스로 보이는 매직이 완성될 텐데 그 조차 관심이 없는 듯하다.

갑작스러운 우리의 방문에 가게 안은 금세 만원이 되어 버렸다.

오랜만에 사람 소리로 북적이고 죽어가던 가게에 생명의 활기가 불어넣어 진다.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그냥 말만 하면 뭐든 뚝딱 만들어 준다는 건가? 어찌 된 일인지 메뉴판도 없다.

주인이 직접 서빙을 하지도, 당연 서버가 따로 있지도 않다.

선배가 알아서 시켜준 오렌지 주스가 주인의 손으로부터 벗어난 후 건너 건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한참만에 내 손에 쥐어준다.

테이블이 없으니 손에 들고 마시라는 무언의 뜻인가 보다.

요즘 같으면 댓글 창에 별 하나도 못 받을 만큼 손님 대접이 영 아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는 작은 공간이 답답했나 한 모금 마시니 목구멍까지 시원해짐이 느껴진다.

소심하게 동동 떠다니는 몇 안 되는 얼음 알갱이가 주스잔 속에서 얼굴을 내밀며 네가 꿈꾸던 커피숍이 이런 곳이었어? 약 올리듯 나를 보고 웃는 것 같다.


딱 하나 만족스러운 것도 있긴 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팝송이 분위기에 맞게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카운터 옆에 흡사 골동품처럼 보이는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LP 판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게 보인다.

어디서 구했을까? 꽤나 고풍스러운 물건을 고른걸 보니 음악엔 진심인가 보다.

감동도 잠시 예스러움을 풍기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나이는 못 속이는지 가끔씩 판이 튀면서 노래가 계속 반복될 때마다 선배의 친구 놀림에 우리는 서로 얼굴 보며 킥킥 거린다.


무엇을 기대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 본 곳은 분명 상상 속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모퉁이 찻집이라는 이름이 주는 정감이 참 좋았다.

누가 지었을까? 그 이름 모퉁이 찻집...

작명솜씨만은 칭찬해 주고 싶다.

이름 값하는 분위기, 인테리어는 더없이 허접했지만 그곳에서 만의 우리의 이야기들이 있고, 소소하게나마 젊은 청춘들의 낭만 가득한 감성만은 충분히 이끌어 내 주던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주고받던 말들...

선배라고 어쭙잖은 충고들을 늘어놓기도 하고, 청춘이라서 아프니까 눈물 콧물을 빼기도 했다.

주점에서 마시는 술 대신 홀짝홀짝 마셔대던 오렌지 주스로 젊음의 낭만 한 모금 들이키던 것도 좋았다.

성당에서 미사가 끝나면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듯 선배들과 들리고, 가끔씩 집에 가는 길에 그 누구도 방해하는 이 없는 그곳에서 조용히 음악 듣고 오던 곳 모퉁이 찻집


이제 흐르는 세월과 함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다방이나 커피숍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어설펐던 그 시절의 기억들은 다 추억이 되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카페는 젊은이들의 성지였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 다면 그 시대(時代)의 상(相)에 맞게 조금씩 변해간다는 것이다.

옛것이 아무리 좋아도 연어처럼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으니 좀 더 크고 화려한 카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우리의 젊은 날을 함께 보낸 보잘것없는 찻집들은 기억 속에조차 흐릿해져 간다.


새로운 발명품을 보듯 신기해 보였던 비엔나커피 한잔도 지금에선 별로 특별할 것 없고 이름이 주는 정감 때문에 머릿속에 맴도는 모퉁이 찻집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다.


지금의 것들 보다는 많이 부족했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었고 손이 많이 가 불편했지만 아날로그 방식이 잘 어울리는 그 시절의 카페들은 새로운 스타일에 밀려 자연히 도태되어 버렸지만 마음 한 모퉁이에는 어렴풋이나마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쩌다 옛 친구와 오랜만에 들른 빈티지하고 앤티크 한 느낌의 오래된 카페에서 그때에 즐겨 찾던 비엔나커피를 마시고 모퉁이 찻집의 기억을 떠올리며 옛 추억에 흠뻑 취하다 보니 잠깐이나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온 느낌이 든다.

긴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떠나가버린 내 젊은 날의 추억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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