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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Nov 22. 2024

옛 친구가 좋다

6시간의 국제전화

 전화가 울린다.

"나 지금 갇혀버렸다!~~"

"비가 많이 와 아파트가 잠겨버렸어... 우리 집은 5층인데 3층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집밖으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니 물이 빠질 때까지 나는 완전히 고립됐다...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남편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구원으로 가는 바람에 지방에 내려가 살다가 때아닌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기는 봉변을 당했음에도 입으로는 심각하다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걱정은커녕 장난치듯 말을 하던 그녀는 나의 40년 지기 오랜 친구다.


 그녀와는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만났다.

처음부터 친구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친구들이 곁에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들은 자신과 맞는 다른 친구들을 찾아 떠나고 어느새 우리는 둘이서만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아침에 먼저 오는 사람이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면 보통의 여자 대학생들처럼 머리에 전기 고대기로 컬을 만들었느니, 요즘엔 청치마가 유행이라느니 하면서 시대를 불문하고 주로 외모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은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강의실까지 함께 걷는다.


 점심시간에는 당연히 도시락을 싸와 같이 먹고, 공강(空講)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 공부도 하고, 그날의 수업이 모두 끝나면 또다시 교문 앞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가 먼저 온 사람이 올라타면 손 흔들면서 배웅해 주는 것으로 우리의 하루는 끝이 난다.


 그 어느 누구에게든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오직 둘이서만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였으나 우리가 유별스러워서 그런 건 아니다.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도 새 학년 초기에 한번 정한 친구가 졸업 때까지의 친구로 새로운 다른 누군가는 이미 짜인 관계 속으로 끼어 들어가는 일이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출처 불명의 룰이 공공연히 정해져 있었다.


 톡톡 거리면서 할 말은 다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언짢아지거나 나쁘지는 않고, 약간의 자기 자랑이 섞여 있는 말투지만 그러려니 하고 듣다 보면 오히려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남들이 그런 그녀를 보면 재수 없다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나는 왠지 그 모습도 괜찮았다.

어쩜 내게도 그런 면이 있었는지도... 그래서 둘 다 서로를 알아보았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졸업을 한 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그녀와는 헤어지게 된다. 

내가 먼저 결혼을 하고, 꿈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평범하다고 놀리던 현모양처의 꿈을 실현하려는 듯 그녀는 3년 정도 후에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학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접고 미국으로 떠난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카톡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편지나 전화 말고는 서로 닿기가 쉽지 않았을 때라 누구든 연락이 멈추면 자연스레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위기에도 비싼 국제전화 요금도 마다하지 않고 전화가 온다.

서로의 가족 사정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는 우리는 가족안부부터 시작해서 그 끝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 비용이 걱정 돼 빨리 끊자고 하면 비행기 타고 한국 가는 비용보다는 싸다고 쿨하게 말하면서 같은 방에 편안하게 마주 앉아 수다 떠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과 나의 하루를 전화로 주고받는다.

끊고 나서 시간을 확인하면 보통이 6시간이다.

서울과 지방간 전화도 아니고 한국과 미국 간 국제전화로 6시간이 넘게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용적 부담이나 시간적, 여러 면으로 볼 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그녀는 그 어려운 걸 해내곤 한다.


 몇 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는 남편의 교수 발령으로 지방에 정착을 한다.

같은 서울이 아니다 보니 시간내기 힘들어 만날 수는 없지만 유선 전화기에 연결된 선처럼 길게 이어져 바쁘게 사느라 가끔씩 잊고 지내도 한 번씩 채찍질하듯 일깨워주며 다시 찾아주곤 한다.


 그녀가 한국에서 자리 잡아가는 동안 반대로 이번에는 내가 캐나다로 떠나오게 되면서 또다시 관계가 끊겨 버릴 수도 있는 조건이 더 많아졌지만 처음에는 메일로 지금은 카톡으로... 용케도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궁금해하면서 지내고 있다.

같은 한국에 살았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듯이 태평양 건너 먼 곳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면서...


 시차가 맞지 않아 서로의 시간을 맞추기 어렵지만 잠을 반납하고 "낮에 자면 되지" 하면서 날밤을 새 주기도 하고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면 밑천이 다해 지겨울 텐데도 그녀의 보타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멈출 줄을 모른다.

뭔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 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한국엘 가면 그녀가 바쁜 걸 알지만 꼭 연락을 한다.

그러면 없는 시간 쪼개서 서울까지 와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나 홀로 여행의 목적지로 정하고 핑계 삼아 내가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도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버스 시간에 쫓겨 후다닥 거리는 일을 반복하곤 한다.

단 몇 시간만 주어진 잠시의 만남이지만 길게 나누는 대화로 버리는 것 하나 없이 꾹꾹 눌러 담아 하루를 다 채운다.

아쉬움을 한가득 안고 차창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젊었던 우리의 옛 추억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깜깜해 보이지도 않는 창밖을 무의미하게 바라보고 있다 보면 말하느라 에너지를 다 했는지 고단해진 몸이 스르륵 잠으로 이끈다.

그러면 잠시 후에 띵동 하고 문자가 온다.

하루종일 붙어 앉아서 수다 떨고도 못다 한 이야기들이 핸드폰의 그 어떤 여백도 없이 편지처럼 빼곡하게 적혀있다.

"오랜만에 널 만나서 좋았다..."

슬픈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끝까지 쭈욱 읽어 내려가다 보면 괜히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시절에 만나서 친구의 연으로 엮인 끈을 놓지 않은 채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꼭 만나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각자의 삶이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해도, 어쩌다라도 만나면 늘 반갑고 편안한 그런 사람 친구.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은 감춰야 하고 주고 나면 받아야 하는 이런저런 계산이 들어가게 되는 사회에서 알게 된 관계와는 그 깊이와 결이 너무도 다른 그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그렇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떠나는 게 사람관계인데 변함없이 몇십 년을 가까운 친구로 곁에 남아 있어 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난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바빠졌다고 한 이후로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카톡 국제전화 한 통으로 올 한 해는 또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도 보고, 열심히 잘 살았을 테니 잘했다고 토닥토닥해주고도 싶다.

전화 끊을 때 늘 하는 말 "내년에도 우리, 너도 나도 잘 살자"는 말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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