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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몰토크 Dec 14. 2024

어느새 겨울

설원(雪原)의 한가운데...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다.


아침에 커튼을 걷으니 온 세상이 하얗다.

밤새 내린 눈으로 지붕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빈틈없이 봉긋하고 나무들은 예쁜 눈꽃을 피웠다.

아직은 때가 이른데 뭐가 그리 급한지 갑작스러운 방문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허둥대는 가을을 서둘러 떠나보내고 겨울이 터줏대감 행세를 한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밤에 홀로 깨어 눈뿌리는 기계라도 작동시킨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이 마치 입이라도 틀어막은 듯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떠다니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차분하게 밑으로 내려앉게 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좋아라 하는 아이들처럼, 신이 나 하얀 눈밭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이른 아침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펜스 위에 높게 쌓인 눈을 장난치듯 무너뜨리며 재빠르게 뛰어다니던 청설모마저 숨어버리게 만드는 짙은 적요(寂寥)가 깔리며 침울해 보이는 바깥세상만큼이나 마음을 가라앉힌다.

 

잠도 자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탓에 20cm 이상 높은 눈탑을 세워 놓았건만 반복하고 있는 단순함이 지겨웠는지 눈발이 조금씩 굵어진다.

무작정 높이 높이만 올라가던 탑이 많아진 양의 눈세례에 기가 눌려 더 이상의 층을 높이지 못한다.

지금껏 애써 쌓아 놓았던 모래성이 한 번에 훅~ 하고 그 형체를 잃어가듯 눈탑이 아래로 툭툭... 저절로 무너져가고 예쁘기만 했던 눈꽃들도 축축 늘어지면서 조금 전의 화려했던 미모를 지키지 못하 니 점점 추한 못난이로 변해간다.

갑자기 아름다웠던 동화나라 속 눈꽃마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방이 막혀 입구마저 사라진 설원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홀로 와닿은 느낌이다.

잠잠하던 바람이 눈의 나라에 초대되어 차가운 공기를 입으로 뿜어내면서 무서운 무언가가 등장하기 전의 공포영화 속 분위기처럼 음산(陰散)함이 낮게 펼쳐지고 개와 늑대의 시간을 연상하게 할 만큼 한낮이 다가오는데도 해 질 무렵인 것처럼 창밖은 흐릿흐릿하다.

갈 곳 잃어 이리저리 나부끼던 나뭇잎들조차 남김없이 삼켜버린 하얀 눈더미와는 대조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장면을 바라보듯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마음까지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유난히 겨울이 오래 머무는 이곳에서 피는 봄이 다시 올 때까지의 기나긴 시간들은 곰처럼 겨울잠이라도 곤히 자야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진다.


이래 저래 불편해진 마음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가본다.

현관 옆 창문을 통해 궁금해진 집 밖의 풍경을 관찰하듯 바라본다. 

멈춤을 망각한 듯 내리는 눈 속에 파묻힌 집들이 인적 없는 깊고 깊은 산속에 고립된 듯이 고요하기만 하고 얼굴만 빼꼼히 드러낸 굴뚝에서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이웃들의 무사 안부를 전한다.


매년 반복되는 일에 관심이 없을 듯도 하건만 언제부터 부지런을 떨었을까? 한집 한집 조명등을 밝히며 어느새 겨울맞이를 시작했다.

그 빛이 쉼 없이 나리는 눈 때문에 어두워진 거리를 조금은 밝혀주지 않을까 기대해 보지만 이성을 잃은 듯 양보를 않으니 그도 소용은 없는 듯하다.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시야를 안고 사람대신 어쩌다 한 대씩 지나는 하얀 모자를 뒤집어쓴 자동차만이 한없는 적막함과 고독감을 더할 뿐이다. 


가을 하면 무작정 떠오르는 쓸쓸하다는 느낌이 더는 가을만의 국한되는 감정은 아닌 듯싶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잠든 듯이 조용한 가운데 처연하게 눈이 나리는 날의 쓸쓸함은

 가을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

다가오는 것 같

다. 

 


해님이 한 번씩 고개를 내밀어주는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소심한 날 

머릿속의 생각들도 덩달아 음울(陰鬱)해진다.

추위는 시작도 안 했는데 월동준비할 시간도 없이 찾아온 겨울의 입김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제법 한기가 느껴진다.


눈 깜짝할 사이 스쳐 지나듯 여러 계절이 우리 곁을 맴돌다 떠나고 이렇게 또다시 일찌감치 찾아온 겨울과 함께 떠밀리듯 올해도 마무리해야 할까 보다.

온 세상을 감싸 안은 눈이 누구에게나 지나온 한 해 동안 머물며 조금이라도 힘들게 했던 일들이 있다면 그마저 완전히 덮어버리면 좋으련만...


추운 날씨 탓에 좁쌀보다 작은 알갱이로 비인지 눈인지 구별도 어려운 눈이 아니라 알이 제법 굵은 함박눈이라도 펑펑 내려 준다면 마음에 가득 차 불편했던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눈처럼 하얗게 비워낼 수 있으려나?

매직처럼 포근해지는 마음을 덤으로 받고 그 마법이 사라지기 전에 모두 리셋해서 편안한 것으로만 골라 담고 싶어 진다.


작은 요정들이 하늘 어귀부터 시작해서 군데군데 구멍이라도 뚫어놓은 것처럼 쉬지 않고 내리는 눈으로 바깥세상을 한껏 에워싼 채 올해가 가고 있다.

또 한 해가 말없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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