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가?
가끔은 나이 드신 어른들이 하는 말이 마음을 적실 때가 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인생론 같은 걸 테니...
그 말 안에 자신의 성공과 실패, 눈앞에 펼쳐진 양갈래길에 선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해 놓쳐 버린 많은 기회들... 이 모든 것들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국 슈퍼에 들렀다.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한국 음식이 먹고 싶으면 반드시 한국 슈퍼엘 가야만 했었다.
한국 식품이라 해봐야 종류도 별로 없고, 이곳까지 싣고 와야 하는 비용까지 추가되어 값도 비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용하다가 한국에 나갈 일이 생기면 핑계김에 박스에 바리바리 싣고 오곤 했다.
오랜 시간 사는 동안 익숙해진 탓에 웬만한 것들은 다 로컬 슈퍼에서 해결하고 지금은 어딜 가나 한국 상표가 붙은 물건들도 많이들 진열되어 있어 굳이 그곳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사실 없다.
좀 더 특별한 한국적 음식이 당길 때 뭐가 있을까 싶어 가끔씩 방문하는 정도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제철에 맞춰 봄이 되면 봄나물이 수두룩 해서 입맛을 끌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가끔은 달래, 냉이 같은 것들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새로운 것이 있을까 해서 둘러본다.
늘 그렇듯 한국인들 못지않게 외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특히 김치나 한국의 맛있게 매운 그 맛을 알아버린 외국인들은 정말 좋아한다.
기웃기웃하면서 한 바퀴 돌다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즉석밥 한 박스를 힘겹게 꺼내시길래 살짝 도와 드렸더니 고맙다면서 한 말씀하신다.
"마지못해 살아요..."
마치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라도 하듯 무심하게 툭...
웃음기 사라져 버린 얼굴에는 힘겨운 삶에 절어버린 듯한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처음 보는 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뱉어버린 그 말 뜻은 아마도 죽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는 말일 것이다.
살거나, 죽거나... 주어진 삶을 테스트하듯 두 가지 선택만 할 수 있는 질문지를 받아 들기는 했는데 그 선택조차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으니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도 않고, 죽지 않으니 살아야 해서 억지로라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갈등과 그렇다고 명석한 해답을 찾지도 못한 자기 체념에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결국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인가?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을 그런 말들이 이제는 몸으로, 생각으로 느껴진다.
60대도 그러한데 하물며 내 부모는 어떨까?
이미 90이 넘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원하지 않아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지는 삶...
본인들이 90을 넘어서까지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을 테니 그것에 대한 준비가 아무것도 없는 채로 무작정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이라 하루하루가 고달프기만 하다.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이제는 눈도 희미해서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고, 다리에 힘이 없어 자꾸 넘어진다며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어린아이 떼쓰듯 내일이라도 당장 오라며 꺼이꺼이 서럽게 우니 마음이 무척 안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 기계의 부속이 하나, 둘 말썽을 부리듯 몸의 장기들도 하나씩 삐거덕 거리다 완전히 멈출 때까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목숨만 연명하면서 사는 건 곤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은 아직도 소년, 소녀라 친구들과 뛰어놀던 그 옛날 생각으로 당장 만나자고 전화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누구를 만나러 외출을 하는 일조차 힘겹고, 행동반경이 제한적인 좁은 집안에만 있으려니 감옥에 갇혀있듯 늘 답답하다.
그렇다고 막상 밖으로 나간 들 모르는 사이 점차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기계들 천지라 주문을 할 수도 없어서 사 먹는 것조차도 어렵고,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나이 든 꼰대라고 폄훼(貶毁)해버리는 시선이 싫어 입마저도 닫아버린다.
점점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지고 재미나 흥미를 이끌 수 있는 유흥 도구가 없다 보니 TV를 유일한 친구로 삼아 하루종일 그 앞에 앉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일상이 된다.
주말에 찾아주는 자식들 기다리는 일 말고는 인생의 낙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는 지루한 삶...
그 삶이 결코 좋을 리가 없으니 살만한 일도 없을 듯하다.
옛날보다 수명은 길어졌을지 몰라도 노인들에게 있어서의 삶의 질이란 어쩌면 더 나빠지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을 해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 외롭고 적응하기도 힘든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어 진다.
우리가 나이를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도 없으니 점점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입안이 깔깔해서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만들어 먹는 것조차도 힘에 부치다 보니 이렇게라도 먹으면 입맛이 돌까 해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한 박스라고 해봐야 며칠이나 견딜 수 있다고...
자식들도 이곳에 사는데 저들의 삶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혼자 있는 엄마를 돌보지 않고 방치한다는 욕을 먹게 하고 싶지 않은 변명은 아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사람이 없어서인가 푸념하듯 던진 마지못해 산다는 그 말이 참으로 슬프게 들린다.
이런 갑작스러운 말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걸 보니 나이를 먹는가 보다.
나이는 누구나 공평하게 드는 거니까 아직은 젊다고 해서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시간이 많다고 장담을 할 수도 없다.
세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간다.
몇 년 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딱히 원하는 것도 없어지고,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한들 자존감이 낮아져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자꾸 의심한다.
게다가 움직임도, 생각도 굼떠 느려지고, 어떻게든 버티면서 해내려 해도 예전 같지는 않으니 따라오는 우울감과 상실감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켜 삶의 악순환을 반복시킨다.
몸과 마음은 역시 공생을 하면서 서로를 다독이면서 가야 하나 보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도 몸이 안 따라주면 다 거짓이 돼버리니까...
지금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모두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말은 꽤나 매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길어진 삶이라는 매혹적인 의미와는 달리 연식이 오래되어 퍼석퍼석 기름기 빠진 낡은 몸과 마음이 여기저기 고장 난 상태에서 숨만 쉬면서 살아가는 삶은 고통일 수도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지만 잘은 모르겠다.
수명이 연장되듯 거기에 맞춰 우리 몸의 기능이 쇠하는 시간도 함께 늘어나야 100세 시대의 의미가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