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사과가 농익은 듯 탐스럽다.
농약이나 비료, 물조차도 인위적으로 주지 않았는데 비와 햇빛만을 먹고도 잘 자라준 자연 그대로의 열매다.
작년에 남편이 가지 치기를 해서 인가 올해는 더 많이 열린 듯하다.
다 자란 아이들 시집, 장가보내듯 때 되면 떠나보내야 하는데 꽤 부리느라 노처녀, 노총각 될 때까지 옆에 끼고 있은 꼴이다.
게으른 우리와는 달리 부지런한 앞집은 어김도 없이 해마다 8월이면 부부가 함께 한 아이도 남기지 않고 다 따 버린 탓에 일찌감치 나뭇가지가 썰렁하다.
추석전후는 돼야 맛이 들 것 같아 좀 더 기다렸다 따야지 했다가 죽 쒀 개한테 주듯 열심히 키워놓은 우리 아이들 다람쥐의 사촌인가? 청설모들의 먹잇감만 만들어 준 셈이 되어 버렸다.
일 안 해도 먹을 것이 천지사방이라 이미 무위도식(無爲徒食)에 길들여진 저들은 남은 사과들마저 눈독을 들이며 남김없이 따먹어 버릴 속셈으로 시도 때도 없이 펜스 위를 누빈다.
아마도 앞집은 저들의 계략을 눈치챈 것이 분명하다.
저들을 허용하고 다 따가도록 놔두고 싶지는 않았는 모양이다.
서둘러 다 정리해 버린 걸 보니...
누가 채갈까 몰라 익기도 전에 잽싸게 하나 따서 입에 물고 다다다다~ 달려가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얄미워진다.
서리꾼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듯 얼마나 빠른지...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없으면 슬며시 다시 나와 양손에 사과하나 들고 커다란 앞니로 껍질 벗기면서 먹는 모습이 예전 갈갈이라는 예명을 가진 코미디언이 "무를 주세요" 하면서 무를 들고 껍질 까던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야생이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먹을 것 같은데도 껍질의 식감이 속살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열심히 까서 바닥에 흩뿌려놓고는 알맹이만 양볼에 볼록해지도록 넣고 뇸뇸 잘도 먹는다.
여기에 가끔씩 날아와 서리가 아닌 대놓고 쪼아 먹는 까치들까지... 우리 집 사과는 사방이 적이다.
약탈자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가엾은 사과들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채로 가운데가 푹 파이기도 하고, 열매가 가득 매달려 있으니 음식 귀한 줄 모르고 놈들이 먹다 버려진 채로 매달려 있던 녀석들은 명을 다하지 못하고 땅으로 툭 떨어져 또 다른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스러져 가기도 한다.
더 이상 곁에 두는 욕심을 부리면 안 될 것 같아 추수감사절 휴일에 남편과 뒷마당에 나가본다.
손으로 꼭지를 살짝 비틀어 주면 쉽게 딸 수 있어 장비 없이 손을 갖다 대니 아무런 반항도 없이 툭하고 떨어져 버린다.
너무 익어버렸나?
역시 사람도 열매도 다 때가 있는 법인가 보다.
진즉에 따줄걸 하는 마음이 든다.
예쁜 아이들 골라 친구, 지인... 이 집 저 집으로 나눠주면서 노처녀, 노총각,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은 것처럼 외모(?)에 밀려 아직 남아있는 애들은 맛도 그다지 좋을 일이 없다.
얼른 썩썩 썰어 냄비에 넣고 설탕과 레몬즙까지 뿌려 불위에 올려놓는다.
콩포트(compote)나 잼으로 만들어 빵에 발라먹거나 베이킹 재료에 쓰기에 그만한 것도 없으니까...
가을 수확이 끝나면 어미나무는 가벼워진 몸이 되자마자 본능처럼 겨울맞이 준비에 들어갔는지 푸른 색옷을 벗고 노란색으로 갈아입는다.
이파리도 하나씩 떨어지고 나면 마른 가지만 남을 테지...
아이들 모두 독립시키고 나이 들어가는 우리네 모습이랑 다를게 무엇일까?
봄에는 봉우리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신기해서 웃고 여름에는 커가는 열매를 바라보며 뿌듯해했다.
성숙의 미를 뽐내는 가을이 다가와 늦었지만 수확하는 기쁨이 끝나고 나니 한 해가 또 이렇게 가는가 보다.
조금 전 스토브 위에 올려놓은 냄비가 어느새 보글보글 끓고 있다.
온 집안을 휘감은 달디 단 사과향으로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풍성한 계절의 넉넉함 대신 창밖에는 한 폭의 쓸쓸한 가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