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꽃향기가 나는 나만의 아름다움
문학가라는 희망을 엄마는 내 이름에 담았지만, 패션 디자이너라는 꿈을 나는 갖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3남 5녀인 8남매의 맏이었다. 모두 소문난 미남, 미녀들이었는데, 개성도 강했다. 우리 엄마가 그중의 맏이었으니, 여장부가 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엄마 친구들은 여장부같은 엄마 뱃속에서 어떻게 정반대인 나같은 딸이 나왔냐고 놀라곤 했는데, 패션 디자이너의 꿈도 여성스러움도 모두 멋쟁이 이모들이 갖게 해 주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살던 이모들은 쫓아오는 남자들로 항상 집 밖이 시끄러웠다. 셋째 이모는 미스코리아 출신이다. 난 이제까지 살면서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더해진 그렇게 우아한 미인을 보지 못했다.
셋째 이모는 수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했는데 그중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 동경으로 시집갔다. 나는 당연히 부잣집 남자를 골라 시집간 줄 알았다.
그런데, 동경에 가서 이모집을 가 보고 깜짝 놀랐다. 워낙 비좁게 사는 일본이라 해도 이모집은 다 큰 아들, 딸 둘이 있는데도 방 두 개뿐이며 거실은 커튼으로 칸막이를 해 방을 두 개로 만든 임대 아파트였다. 충분히 재벌집에도 시집갈 수 있던 우리 이모는 돈이 아닌 ‘사람’ 자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모는 항상 행복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멋쟁이였다. 이모가 입는 옷은 전부 직접 만들기도 하고 리폼하기도 했는데 명품옷을 걸친 그 누구보다도 이모는 훨씬 우아했다.
지나다니기도 비좁은 집이지만, 집 안은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예쁘게 꾸며진 집이었다. 이모는 가족들을 위한 식탁도 매일 고급 레스토랑처럼 꾸몄다. 또, 한식 저녁식사를 차릴 때면 한복을, 일본식 식사엔 기모노를, 서양식 식사엔 멋진 양장 차림으로 맞추어 가족들에게 나타났다.
아이들의 도시락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쁜 사랑의 편지를 써넣어 보내곤 했다. 도시락 속 음식이 얼마나 이뻤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케첩으로 그린 하트, 완두콩으로 수놓은 사람 얼굴 등…
이모는 동네 사람들에게 패치워크(헝겊짜깁기) 등 여러 가지 수공예를 가르쳤다. 나도 그때 수업에 참여해서 배웠는데 그것이 나의 공예의 시작이다. 이모는 그곳에도 간식을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아 가져 왔다.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동경에서는 근 4년을 살았는데 이모와 함께 한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나를 무척 이뻐해 주던 이모가 꼭 명심하라고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평생 긴장하고 흐트러지지 말아라. 절대 집에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퍼지지 말아라“
나는 하루도 걸르지 않고 운동을 하며 긴장하며 살고 있다. 주로 걷기 운동이다. 덕분에 내 몸무게는 항상 똑같은 숫자를 유지한다. 집에서 고무줄 바지는 절대 안 입는다.
미인박명이라는데 이모는 일찍 암으로 돌아가셨다. 항암으로 삭발을 했지만, 항상 이모가 만든 멋진 머플러나 모자를 쓰고 영화배우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한 번도 이모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봐 온 것은 이모의 환한 웃음 띤 얼굴뿐이다.
내가 깨달은 건 꼭 명품, 비싼 옷만이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본 이모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소유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멋쟁이였다. 나는 그때부터 명품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다. 일본에 살면서부터 안 입거나 유행이 지난 내 옷을 이모처럼 리폼해서 입기 시작했다. 항상 내 곁에는 바늘과 실이 있다. 내가 지금의 공예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때부터의 내 만들기에 대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행이 지난 긴 코트는 밑단을 잘라 짧게 리폼했고. 잘라낸 밑단은 리본을 만들거나 머플러, 허리벨트를 만들어 코디를 하기도 했다.
내가 가장 처음 한 가죽공예는 가죽리본이다. 가방끈이 부서져 못 쓰게 된 검정 가죽 서류 가방을 잘라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리본 몇 개를 만들어서 옷이나 모자에 달았는데 멋지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해 주었다,
명품옷을 입지 않아도 모두들 나를 ‘멋쟁이’라고 불러 주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최고의 찬사는 “이모 닮아서…“ 였다. 지금도 지인들은 아름다운 이모를 기억해 준다.
나는 꼭 이모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스며 나와 외면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꽃보다 예쁜 여자’이다. 아름다운 꽃향기가 나는 여자이다.
꽃을 주제로 가죽꽃을 만드는 나는 업사이클링을 즐겨하고 있다. 업사이클링(upcycling)은 업그레이드(upgrade)와 리사이클링(recycling)을 합친 단어이다. 리사이클링은 버려지는 쓰레기를 재처리하여 다른 목적으로 재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새활용’이라 표현되는 업사이클링은 버려지거나 쓸모 없어진 것들을 나만의 디자인으로 한 차원 더 높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전혀 다른 새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들다가 싫증 난 오래된 가죽가방이나 가죽옷들을 가죽꽃으로 재탄생시켜 선물하면 참 좋아한다.
내가 업사이클링을 하게 된 계기는 바로 블로그 이웃의 따뜻한 마음 덕분이다. 그 이웃은 가죽공방에서 만들다 남아 버리는 자투리들이 혹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며 내가 사는 양주시 외곽까지 갖다 주었다. 들기 무거운 가죽쪼가리 세 포대를 손수 싣고 온 것이다.
물론 버려지는 것들이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사실 내가 하는 가죽공예는 아주 부드러운 양가죽이나 염소가죽으로 만들어야 모양이 이쁘게 잡힌다. 그런 가죽은 없었지만, 그중 부드러운 것만 잘 골라 만들어 보았고 버려지는 것들을 이렇게 공예에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유행이 지난 양가죽 잠바나 핸드백등을 오려서 사용해 보기 시작했는데 버려지는 가방에서 오려 낸 가죽을 업사이클링해 너무나 예쁜 꽃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느끼는 기쁨은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도 지인이 내게 준 오래된 명품가방을 예쁜 가죽꽃과 나비, 리본이 달린 헤어밴드와 헤어핀으로 업사이클링해 선물을 했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뻔한 아까운 자원을 새롭게 창조해, 우리의 환경을 보전하고 자원순환을 하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는 기쁨은 나도 환경보호를 하는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부심까지 생긴다.
공예는 꼭 재료를 사서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재료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가죽공예가에도 도전할 수 있다. 맨 처음, 버려지는 가죽가방으로 리본을 만들어 보다가 가죽공예가가 된 나이다. 가죽은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에 패션에 고급스러움을 더해 준다.
하늘나라에 가신 우리 엄마가 생전에 즐겨 입던 가죽조끼가 있다. 사이즈가 커서 밑단을 잘라 벨트를 만들어 변화를 주었고, 가죽장미를 만들어 달아 보았다. 자칫 노인의 느낌을 줄 뻔했던 가죽조끼가 그럴 듯 해졌다.
엄마와 이모가 하늘나라에서 함께 환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