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MoMA 로비에서 만난 오디타와 사샤 스타일스

by 꽃보다 예쁜 여자




뉴욕 맨해튼의 5번가에서 타임스퀘어를 지나 센트럴파크 쪽으로 올라오는 길, 유리와 강철로 둘러싸인 빌딩 사이로 MoMA라는 글자가 보인다. 멀리서도 보이는 표식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건물 외벽을 따라 입구 쪽으로 다가가면 커다란 통유리창과 마주친다. 유리 너머로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진열대 사이를 오가며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MoMA 디자인 스토어의 풍경이다. 아직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기 전인데도, 안과 밖의 경계는 이미 흐려져 있다. 이 미술관의 전시는 늘 길 위에서 시작된다.






로비의 벽, 색으로 말하는 공동의 리듬


오딜리 도널드 오디타, <Songs from Life>


뉴욕현대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전시실이 아니라 아그네스 군트 가든 로비(Agnes Gund Garden Lobby)다. 이 열린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나이지리아계 미국 작가 오딜리 도널드 오디타(Odili Donald Odita)의 대형 추상 회화 설치다.


이번 전시 <Songs from Life>는 로비 전체를 작업의 일부로 삼는다. 벽과 기둥, 천장까지 색면과 기하학적 패턴이 이어지며, 공간 자체가 하나의 회화가 된다. 오디타의 작업은 회화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전시는 분명히 캔버스를 벗어난다.





밝은 색의 띠들은 장식처럼 머물지 않는다. 위아래로, 좌우로 교차하며 로비의 공간을 다시 나눈다. 그림 앞에 멈춰 서기보다 자연스럽게 걸어 나가게 되고, 색은 나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의 리듬처럼 다가온다.


<Songs from Life〉(삶으로부터의 노래) 전시 제목처럼 이 작업은 음악에서 출발한다. 재즈, 아프로비트, 소울과 힙합 등 오디타의 삶 속에 스며든 음악들이 색과 형태의 구조로 옮겨져 공간을 이룬다. 이번 전시와 함께 제공되는 작가의 플레이리스트 QR 코드를 찍는 순간, 색의 패턴은 리듬으로, 색의 대비는 음의 높낮이처럼 느껴진다. 색을 바라보고, 소리를 들으며 그 리듬 속을 걸어 지나간다.


음악은 내 그림 속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몸에 먼저 닿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 Odili Donald Odita, MoMA 인터뷰





색채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


오디타는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해 온 작가로, 색채를 통해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공동체, 역사에 대한 감각을 탐구해 왔다. 그는 이를 직접적인 서사로 설명하기보다 추상이라는 언어에 맡긴다. 이번 전시 역시 이야기 대신 색과 리듬, 공간의 경험으로 관객 각자의 감각을 불러낸다.


MoMA 로비는 티켓 없이도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다리다 고개를 들면 색이 있고, 이동하다 보면 패턴이 바뀐다. 의식하지 않아도 작품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전시는 2026년 4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스스로 쓰이는 시, 살아 있는 언어


사샤 스타일스, <A LIVING POEM>


같은 로비 한쪽 벽면의 현대 디지털 월(Hyundai Digital Wall)에서는 전혀 다른 리듬의 작업이 펼쳐진다. 언어 예술가이자 인공지능 연구자인 사샤 스타일스(Sasha Stiles)의 〈A LIVING POEM〉이다.


1980년생인 사샤 스타일스는 몽골과 러시아의 칼미키야 공화국, 영국 등지에 흩어져 살아온 칼미크족(Kalmyk) 뿌리를 지닌 미국인 1세대다. 언어 예술가이자 인공지능 연구자로 활동하며, 2018년부터 인간과 기계가 함께 언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이 작품은 60분마다 새로운 문장으로 다시 쓰이는 <살아 있는 시> 다. 작가의 글쓰기 방식과 목소리를 학습한 인공지능 ‘테크넬레지(Technelegy)’가 문장을 생성하고, 글자는 화면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같은 시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완성본도, 결말도 없다.


글자는 여러 서체로 변주되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커시브 바이너리(Cursive Binary)’다.. 사람의 필기체(Cursive)와 기계 언어의 기본 단위인 이진법(Binary)이 하나의 글자 안에 겹쳐진다. 손글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컴퓨터 언어의 기본 단위인 0과 1의 구조가 숨어 있다. 인간의 사고와 기계의 논리가 하나의 글자 안에서 공존한다.





나는 언어를 고정된 기록이 아닌,
사용되는 순간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본다.
- Sasha Stiles, MoMA 인터뷰


스타일스는 이 작업을 ‘상주 시(poem in residence)’라고 부른다. 전시를 위해 잠시 놓인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계속 생성되고 변형되며 머무는 존재라는 뜻이다. QR 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사운드스케이프는 스타일스의 스튜디오 파트너인 크리스 본즈(Kris Bones)가 제작한 것으로, 시가 본래 글 이전에 목소리와 리듬에서 시작된 예술이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A LIVING POEM〉은 뉴욕에만 머물지 않는다. 2025년 3월부터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로비에 설치된 현대카드 MoMA 디지털 월에서도 같은 작품이 상영되고 있다. 같은 시가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뉴욕과 서울, 두 도시를 오간다. 이는 현대카드와 MoMA가 이어온 장기적인 파트너십의 결과다.



유리 너머의 정원, 하나의 질문


로비의 통유리 너머로 아그네스 군트 가든이 펼쳐진다. 겨울의 정원은 고요하다. 오디타가 색으로 공동체의 리듬을 풀어낸다면, 스타일스는 언어와 알고리즘을 통해 사고의 경계를 넓힌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두 작업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장면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표현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술관을 나와 타임스퀘어로 향한다. 수십 개의 스크린이 동시에 빛나고, 광고와 문장, 영상은 인식하기도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성되는 언어와 이미지는, 선택하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받아들이게 만든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언어와 이미지가 이미 일상이 된 지금, 중요한 것은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다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판단하며, 그 결과를 누가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아닐까.


사샤 스타일스의 〈A LIVING POEM〉처럼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타임스퀘어의 빛 속에서, 미술관 로비에서 마주한 질문은 더 또렷해진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리 너머의 정원처럼, 그 답은 아직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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