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에서 뉴욕으로, 비틀스가 만든 세계

머지 강에서 스트로베리 필즈까지

by 꽃보다 예쁜 여자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누구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 John Lennon, Imagine (1971)


1980년 12월 8일, 믿기 힘든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을 떠나 뉴욕에 살고 있던 비틀스 (The Beatles)의 멤버 존 레넌이 맨해튼 자택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뉴욕의 밤은 그 순간 멈춘 듯했다. 사람들은 그가 살던 72번가 다코타 빌딩 앞으로 모여들었고, 촛불을 들고 밤새 노래를 불렀다. 〈Imagine〉은 추모의 노래가 되었고, 서로를 위로하는 말이 되었다.


해마다 그날이 되면 사람들은 뉴욕 센트럴파크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Imagine〉을 부른다.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비틀스가 만든 세계


이 이야기가 시작된 곳은 영국 북서부의 항구 도시 리버풀(Liverpool)이다. 머지 강가(River Mersey)에 서면, 강은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이어지고 그 너머로 대서양이 열린다. 물길은 넓게 펼쳐져 있어, 강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


리버풀은 오래전부터 강변의 도시라기보다 항구의 도시였다. 이 강을 따라 이어진 항구 지대는 산업혁명 이후 세계 해상 교역의 중심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떠나고 도착했다. 미국과 카리브해, 아일랜드를 오가는 배들이 닿았고, 이민자와 물건, 소식들은 이 물길을 따라 대서양을 건넜다.


타이타닉은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출발했지만, 리버풀 소속의 배로 리버풀의 이름을 달고 바다로 나갔다.





항구에서 태어난 소리


1950년대 후반, 레코드와 악기, 새 음반들 역시 런던을 거치지 않고 바로 리버풀로 들어왔다. 이 도시의 청소년들은 미국 남부의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을 유행이 아니라 일상의 소리처럼 들으며 자랐다.


비틀스(The Beatles)가 자란 동네들 또한 항구에서 멀지 않았다. 존 레넌(John Lennon)이 자란 멘딥스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집이 있던 곳은 노동자 주택과 중산층 집이 섞인 지역이었다. 아이들은 바다를 보며 자랐고, 떠나는 배와 돌아오는 배를 매일처럼 바라봤을 것이다. 떠남과 돌아옴이 겹쳐진 리버풀의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If I hadn’t been born in Liverpool,
I wouldn’t have been a Beatle.
리버풀이 아니었다면, 비틀스도 없었다.
- John Lennon




항구의 기억을 걷다


지금은 붉은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알버트 독(Albert Dock)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머지 강을 따라 이어진 이곳은 한때 세계로 나가던 물길의 출발점이었고, 창고와 물류가 모이던 항구의 중심이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비틀스 스토리(The Beatles Story). 비틀스가 해체된 뒤 약 20년이 지난 1990년에 문을 연 박물관이다. 항구 산업이 힘을 잃고, 도시가 새로운 길을 찾던 시기였다.


비틀스는 이 도시에서 세계로 나아간 존재였다. 낡은 부두 창고를 고쳐 박물관으로 만든 선택은, 한때 도시를 지탱하던 산업의 자리를 음악의 이야기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도시가 기억하는 방식


리버풀은 그들을 추억으로만 남기지 않았다. 대신 도시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비틀스 스토리는 음악 전시관이라기보다 도시의 기록에 가깝다. 결성부터 해체, 그 이후의 삶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는 전시는, 이 밴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보다 이 도시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보여준다.


비틀스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이어진 알버트 독을 한 바퀴 걸어보니, 이곳에서 비틀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형이었다. 비틀스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항구 도시 리버풀이 세계 문화와 만난 한 장면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밴드의 시작


비틀스의 시작은 1957년이다. 존 레넌이 리버풀의 퀘리 뱅크 고등학교 시절 만든 밴드 쿼리멘(The Quarrymen)은 울턴의 세인트 피터스 교회(St Peter’s Church) 축제 무대에 섰다. 그날 연주를 본 폴 매카트니가 합류했고, 이후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도 함께하게 된다. 훗날 세계를 바꿀 밴드의 출발은, 한 교회 행사 무대였다.


비틀스라는 이름은 1960년, 존 레넌과 초기 멤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e)가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리버풀 대성당 근처를 걷는 길에서 떠올렸다. 당시 미국 로큰롤의 ‘비트(beat)’와, 곤충 이름을 밴드 이름으로 쓰던 유행을 장난스럽게 섞은 것이었다. 진지함보다는 리버풀식 농담과 유머가 먼저 담긴 이름이었다.


이후 이들은 독일 함부르크의 클럽 무대에 올랐다. 밤새 연주하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무대에 서는 날들이 이어졌다. 연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섰다. 그렇게 연주가 쌓였고, 밴드는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61년 2월, 함부르크에서 리버풀로 돌아온 직후 비틀스는 캐번 클럽(Cavern Club)의 정기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머지 강변 피어 헤드(Pier Head), 로열 라이버 빌딩, 쿠나드 빌딩, 포트 오브 리버풀 빌딩이 모여 있는 역사 지구.



지하에서 만들어진 소리


비틀스의 가사를 읊어보며 도시 안쪽으로 들어서 매튜 스트리트(Matthew Street)를 따라 캐번 클럽을 찾았다. 길 아래로 비틀스가 실제로 만들어지던 공간이 내려다보였다. 지금의 캐번 클럽은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라이브 클럽이다. 동시에 작은 박물관처럼, 벽에는 비틀스의 공연 기록과 사진, 기사들이 남아 있었다.


1962년 내내, 낮은 천장과 벽돌 아치로 둘러싸인 이 지하 공간에서 비틀스는 수백 번 무대에 올랐다. 관객의 반응이 즉각 돌아오는 캐번 클럽은 연습실이 아니라 시험장이었다. 이곳에서 비틀스의 음악은 꾸밈보다 박자와 에너지를 앞세운 소리로 다듬어졌다. 그들의 음악은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이 작고 답답한 지하 공간에서 끊임없이 쌓인 노력의 결과였다.





세계로 나아가 끝에 이르다


링고 스타(Ringo Starr)는 1962년 정식 멤버로 합류했고, 네 명의 구성은 이때 비로소 완성된다. 같은 해 〈Love Me Do〉로 데뷔해 〈Please Please Me〉가 히트했고, 1964년 에드 설리번 쇼 출연으로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전성기 한가운데서 비틀스는 방향을 틀었다. 1966년 투어를 멈추고 스튜디오로 들어가 음악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1967년 발표된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Penny Lane〉은 더블 A사이드 싱글로 공개되며 그 변화를 알렸다.


변화는 곧 갈등으로 이어졌다. 음악적 방향과 사업 문제, 개인의 생각이 어긋나며 틈은 점점 깊어졌다. 1970년, 폴 매카트니의 탈퇴 선언으로 비틀스는 공식적으로 끝난다. 이후 네 사람은 각자의 이름으로 무대에 섰고, 저마다 다른 길을 걸었다.


마지막 앨범의 제목은 〈Let It Be〉였다. 다시 함께해 보자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비틀스의 끝을 그대로 남겼다.





강과 바다에서 태어난 소리


리버풀은 영국의 중심 런던에서 떨어진 도시였다. 기준을 따를 필요도, 억양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비틀스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다. 머지 강과 아일랜드 해, 항구와 부두, 런던에서 떨어진 위치, 그리고 지하의 작은 클럽. 이 모든 지리적 조건이 겹치며 네 명의 청년은 같은 소리를 나누게 되었다. 비틀스는 특정 장르에서 출발한 밴드가 아니라, 강과 바다 사이에서 태어난 밴드였다.


항구는 만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비틀스의 마지막 또한, 그들이 태어난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리듬을 닮아 있었다.





만남, 그리고 ‘Yes’


1966년, 런던 메이페어의 작은 전시장 인디카 갤러리(Indica Gallery)에서 존 레넌은 한 작품 앞에 멈춰 섰다. 오노 요코(Yoko Ono)의 〈Ceiling Painting (YES Painting)〉이었다. 사다리를 올라 돋보기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는 작은 글자, 단어 하나. ‘Yes’


이미 세계적인 스타였던 존 레넌은 이 단어가 전하는 긍정의 감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1969년 결혼한 이들은 같은 해 침대 위에서 반전 평화 시위 ‘베드-인(Bed-In for Peace)’을 함께 벌였다. 음악과 예술은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뉴욕으로 옮긴 뒤 존 레넌의 음악은 노래를 넘어 함께 생각해야 할 문장이 되었다. 음악은 더 거칠고 솔직해졌고, 그 흐름의 끝에 1971년 〈Imagine〉이 나왔다.


국경도, 종교도, 소유도 잠시 내려놓고 상상해 보자는 이 노래는 위로처럼 들리지만 질문은 날카로웠다. 미국 사회에서 이 노래는 근본을 건드렸고, 불편하게 받아들여졌다. 노래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존 레넌은 한때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Imagine〉은 점차 위로와 애도의 노래로 불리게 되었고, 질문은 그만큼 노래 속으로 깊이 묻혀 갔다.



존 레넌은 1975년 태어난 아들 션 오노 레논의 출생을 계기로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센트럴파크를 유모차를 끌고 걷는 일상이 그의 하루가 되었다.



멈춰 선 밤


1980년 12월 8일 밤, 이 여정은 비극으로 멈춘다. 존 레넌은 뉴욕 맨해튼, 자신이 살던 다코타 빌딩 앞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그로부터 5년 뒤, 오노 요코는 그의 죽음 5주기에 맞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레넌이 자주 찾던 센트럴파크 안에 작은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스트로베리 필즈, 기억을 남기는 방식


스트로베리 필즈. 그 이름은 존 레넌이 어린 시절 리버풀에서 자주 들르던 구세군 어린이 시설 Strawberry Field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 〈Strawberry Fields Forever〉에서 왔다. 리버풀에서 태어난 한 노래의 제목이, 뉴욕의 땅 위에 하나의 장소가 되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단어 하나만이 놓여 있다.


Imagine



조지 해리슨은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들은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폴 매카트니는 영국을 거점으로 세계 무대를 돌고, 링고 스타는 미국을 중심으로 여전히 무대에 선다.



다코다 빌딩 길 바로 맞운편 센트럴파크 내 호수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나 혼자만 꿈꾸는 건 아니야.
- John Lennon, Imagine (1971)


뉴욕 센트럴파크 스트로베리 필즈에서 들었던 〈Imagine〉의 소리는, 끝없이 펼쳐진 리버풀의 머지 강 물길 위로도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 도시를 걷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함께 이 길을 걸어주신 시간들을 마음에 담고, 잠시 쉬었다가 새로운 연재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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