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요즘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매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영유아기 때 이미 텔레비전에 노출되기 시작한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컴퓨터, TV, 스마트폰 등 각종 시각 화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 시각 매체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과의 교류가 없어도 세상을 만들어 내는 가능성, 이것이 바로 현대 매체의 특징이다. 손으로 마우스를, 눈으로 모니터를 쫓으며 게임의 세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이들은, 설령 형제나 친구와 함께 놀 기회가 있다 해도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을 더 선호한다.
현재 기혼 여성의 절반 이상(25년도, 약 66%)이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있는 요즘 부모는 하나나 둘 뿐인 자녀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키울 수 있을지 관심이 많다. 낮에 떨어져 있다가 밤에 돼서야 만날 수 있는 가정에서 엄마와 아이는 문제의 관계가 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는 엄마는 아이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반동으로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용한다. 이 심리에 사로잡힌 엄마는 자녀가 원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못한다. 일방적인 요구와 무조건 들어주기의 관계는 아이가 과잉 애착을 보일 수 있고 사회성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
둘째, 엄마가 낮에 일하고 귀가할 때면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다. 하지만 엄마의 품이 그리운 아이가 마구 안기려 할 때 마음이야 그렇지 않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피곤한 몸은 자꾸 아이를 거부하고 귀찮아한다. 쉬고 싶은 엄마는 아이가 혼자 놀 수 있도록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혹은 컴퓨터를 틀어주는 것으로 타협한다. 파김치가 되어 누워있는 엄마와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의 모습은 요즘 아파트에서 흔히 목격되는 광경이다.
아이들은 속도감 있는 영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짧지만 순간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CF에 유독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도감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상은 새로움과 호기심을 충족시킴으로써 아이의 뇌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신생아의 청각은 생후 1, 2개월이 지나면서 뚜렷하게 발달하여 소리에 예민해지고 4, 6개월이면 소리 나는 방향을 알게 된다. 시각은 생후 1, 2주가 지나면 물체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고 6주경에는 움직이는 물체를 좇을 수 있다. 또 2, 3개월이 되면 색도 구별할 수 있게 되고 4개월이 되면 원근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시각과 청각이 발달하면서 영아는 텔레비전에 더욱 반응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변하는 자극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새로움과 신기함, 낯선 자극에 반응하는 아이가 짧은 순간에 강렬한 이미지를 전파하는 영상 매체, 특히 CF에 매료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강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영상 매체에 한 번 익숙해지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도록 교묘하게 옭아매는 것이 현대 산업 사회의 메커니즘이다. 앞으로 아이에게 주어진 환경은 평생 이미지로 넘쳐날 것이며 아이는 이미지와 필연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각 매체는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화면에 집착하는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집 안에서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치우는 것은 가장 하책이다. 일단 아이의 현실은 시각적인 세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시각 매체에 익숙해진 아이는 온라인게임에 손쉽게 빠져든다.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들다. 어른에 비해 아이는 중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프로이트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는 이드를 통제하는 초자아의 발달이 미숙하다. 하지만 꼭 자제력이 약해서 인터넷 게임에 빠지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게임은 놀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놀이다. 더구나 인간은 놀이의 동물이다. 놀아야 신이 나고 신이 나야 삶의 의미를 느낀다. 과연 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놀이의 영어 play의 어원은 라틴어의 plaga에서 유래한 plega로써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의미가 있다. 운동, 싸움, 게임, 장난, 춤, 스포츠, 전투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놀이에서 재미란 본능을 충족시킬 때 생겨난다. 억제된 것에서 해방되고 스스로를 억누르는 자기 통제에서 벗어날 때 재미를 느낀다. 재미는 타인과의 적절한 경쟁 속에서 나의 능력을 평가할 때,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느낄 때, 몰입을 체험할 때 생겨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노름에 중독되고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은 재미나 자극적인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Greenberg의 의하면 인간은 강렬한 보상적 만족을 제공하는 약물이나 활동에 매료되기도 하는데, 이는 약물이나 활동들이 자아도취적이고 고양된 행복감이나 흥분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비록 놀음-노름이 악용되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지만 ‘건전한 놀음-노름’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 잘 논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놀 수가 없고 놀지 못하면 병이 생긴다. 이렇게 본다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 늙어지면 못노나니”는 기막힌 노래다. 잘 노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고 성공할 수 있다. 놀이는 본능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성장하며 아이의 인지행동발달은 놀이의 발달과 직결된다. 손발을 꼼지락거리던 아이는 몸을 이동하게 되면서 놀이의 반경을 넓혀가고, 언어 능력과 사고력이 생겨나면서 가상놀이로 놀이의 경계를 넓힌다. 아이는 놀이 속의 역할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놀이는 성장 단계에서 비타민과 같은 요소다.
그런데 이처럼 성장과 발달에 필수적인 놀이가 디지털화되어 있는 것이 현대적 추세다. 몸보다는 머리로, 다리보다는 눈으로, 팔보다는 손가락으로 하는 놀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단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강한 중독성을 지닌 것이 바로 컴퓨터 게임이다. 컴퓨터 게임은 한번 입장하여 신나게 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계속해서 승패가 기록되고 단계별 레벨 상승이 있어 인간의 본능적인 승부욕과 과시욕을 자극한다. 게임에 점점 익숙해지는 아이는 갈수록 고수가 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자부심이 생겨난다. 물론 몸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현실 놀이도 재미가 있긴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약속해야 하고 모여야 한다. 또 하나 현실 게임은 컴퓨터 게임만큼 지속성이 떨어지며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특징도 있다. 친구들이 한데 어울려 야구 게임을 하려면 많은 장비와 인원이 필요하다. 한두 명이라도 빠지면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기도 어렵다.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중간에 그만둔다든지 규칙을 어기는 일도 힘들다. 그런 일을 벌이면 곧 왕따를 당할 것이다. 현실 게임은 양보해야 하고 타협도 해야 한다. 그러나 컴퓨터 게임은 이런 점에서 상당히 자유롭다. 컴퓨터가 있는 곳이면 언제든 전원 스위치를 켜고 접속만 하면 곧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누군가 약속할 필요도 없고 게임을 위한 또 다른 장비도 필요 없다. 게임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해도 되고 극단적인 경우 전원을 뽑아 버리면 된다. 자기가 완전히 주체가 된 가상 속의 게임은 편리할뿐더러 능동적이기까지 하다. 가상현실 속의 게임은 혼자 노는 아이에게 안성맞춤이다. 가상게임에 맛을 들이면 현실 게임은 귀찮고 시시하고 재미가 없다.
피곤함에 지쳐 아무 생각이 없는 엄마는 아이가 컴퓨터 앞에 붙어 있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지내는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가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지금 아이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컴퓨터밖에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 중독에 시달리는 아이는 맞벌이 부모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업 주부라도 항상 아이와 함께 있을 수는 없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사이 아이는 자신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 여지는 충분하다. 아이가 컴퓨터 앞에서 잘 놀고 있다고 판단되면 엄마는 집안일에 몰두한다. 아이 돌보기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엄마는 컴퓨터가 고맙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아이와 컴퓨터와의 만남은 점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낀 부모가 팔을 걷어붙이고 컴퓨터를 가로막으며 개입하겠다고 나선다. 아이가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숙제를 소홀히 한다던가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모는 아이의 중독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아이와 컴퓨터는 헤어지기 어려운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있다. 부모는 아이의 게임중독의 책임이 일정 부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엄마는 컴퓨터를 끄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라고 권한다. 엄마는 게임에 빠진 아이의 심리적인 상태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한다. 무조건 시간을 정해놓고 게임을 하라고 하거나 일방적으로 그만하라고 다그친다. 심지어 컴퓨터를 빼앗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는 전원 코드를 빼버린다. 막 적을 섬멸하려는 순간 갑자기 먹통이 된 모니터를 바라보며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냥 포기할까? 절대 포기할 리 없다. 화가 난 엄마의 눈초리와 통쾌한 싸움을 벌이다 현실로 되돌아온 아이의 허망함 사이에 심각한 전운이 감돈다. 아직도 눈앞에는 연기가 자욱하고 적군을 향한 시원한 총소리가 귓전에 가득한데, 엄마의 잔소리는 하나도 접수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잔소리나 훈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엄마가 말하기 시작하면 아이는 듣는 척하지만, 곧바로 귀를 닫는다. 엄마의 속사포는 곧장 시끄러운 잔소리가 되어 허공을 날아다닌다.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아이는 여전히 신나는 온라인 전투에 빠져 있다. 아이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엄마는 게임을 너무 자주 한다고, 한번 붙잡으면 놓을 줄 모른다고 격한 단어들을 쏟아낸다. 엄마가 자리를 뜨면 아이 대부분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방에 틀어박혀 엄마를 원망하거나 친구 집을 찾거나 피시방에 갈 것이다. 양성적이었던 컴퓨터 게임이 음성적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세계를 맛보았는지 엄마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에게 이제부터 가장 큰 걸림돌은 엄마다. 아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엄마는 없지만 엄마는 대개 자신의 눈높이로 아이를 바라보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 이런 엄마를 위해 인터넷 중독을 상담하는 상담사도 있다. 경험과 이론을 지닌 상담사와 상담하면 게임중독 아이와 엄마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독이라는 것은 근본을 터치하지 못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다시 되풀이되는 특징이 있다. 상담을 통해 게임중독이 완화되거나 치료된 것처럼 보여도,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면 다시 게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꽃이 시들었다고 뿌리가 아닌 꽃에다 물을 주면 그 꽃은 얼마 가지 못한다. 특히 인터넷 게임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배려와 양보가 필요 없기 때문에 대인관계나 사회성이 결여될 수 있고 생활 리듬이 깨져 학습 부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에 익숙해지다 보면 현실에서 정서 조절이나 긍정적 타협이 힘들어진다. 모 아니면 도가 되는 사고에 빠지게 되고 점점 닫힌 세계로 나아 간다. 친구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싫은 소리도 듣고 실패도 해 보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지만 가상의 세계에서 사는 아이는 자기 조절 학습의 기회가 줄어든다. 유행병이 돌기 전에 백신을 맞으면 예방할 수 있다. 백신은 약한 바이러스를 몸 안에 집어넣어 몸이 바이러스와 싸울 수 있는 항체가 생겨나도록 한다. 인터넷 게임을 처음 접하는 아이는 유행병에 맞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약한 신체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약간의 충격을 받아도 쉽게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아이는 양보할 때와 주장할 때, 뒤로 물러설 때와 앞으로 나설 때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아이는 자기가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숨이 막히는지,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지, 왕따를 당하(시키)는지도 잘 알아채지 못한다. 이해와 조절 능력 및 현실감이 떨어져 있는 그들에게 백신을 투여할 방법은 없을까.
YTN(2009)에서 국내 연구진에 의해 게임 중독자의 뇌와 마약 중독자의 뇌 구조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게임에 빠져 일상생활이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뇌 영상을 찍어 본 결과 게임 중독자의 뇌 사진이 마약 중독자의 뇌 사진과 비슷한 부분이 활성화돼 있다는 것이다. 이 뉴스는 게임중독이 단순한 반복 행동이 아니라 마약중독과 마찬가지로 뇌 질환,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게임중독에 대한 맞춤 치료 약물과 재활 치료법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아이의 뇌가 선천적으로 중독성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는지, 환경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알코올중독에 있어 전문가는 대략 유전과 환경의 요인을 반반으로 본다. “알코올 의존의 원인을 설명할 때 유전이 먼저냐,환경이 중요하냐는 의문을 갖게 되지만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다.”(‘한국경제’, ‘난 왜 주당이 됐을까?… 알코올 의존증은 유전과 환경이 만든다’) 유전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환경을 통해 어느 정도 뇌의 중독 구조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환경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컴퓨터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를 상담할 때 자주 사용되는 기법이 행동주의 기법이다. 예컨대 컴퓨터를 혼자의 방에 놓지 말고 여럿이 활동하는 거실 같은 공간에 놓아둔다든가, 잠금장치를 실행한다든가, 게임을 허용하되 시간을 분명하게 정해놓고 허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런 방법은 자신의 방에서 어느 때고 장시간 무방비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아이에게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자발적인 방법은 부모가 집을 비우거나 아이가 게임방을 출입하게 되면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쉽다. 말하자면 행동주의 기법은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한다. 한편 정부에서는 자정부터 아침 6시까지 청소년에게 온라인게임을 서비스하지 못하도록 하는 셧다운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고, 온라인게임 중에는 셧다운제가 적용되어 있는 게임이 꽤 된다. 어떤 게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게임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피로도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 업체가 자발적으로 도입하든 정부가 강제적으로 도입하든 이런 시스템은 강압적인 시스템에 속하므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자발성인 아닌 강제성에 의한 통제는 무게에 눌려있는 청소년이 어떻게든 그 장벽을 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일 강제성이 사라지면 순식간에 중독 현상이 원상 복귀될 수 있다.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뜻이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아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치유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전문가들이 권하는 중독성의 뇌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운동이 있다. 특히 어려서부터 운동 습관을 들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운동을 자주 하면 몸과 뇌 속에 운동 습관이 확실하게 저장된다. 뇌는 가역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한번 저장되면 계속 그 방향으로 밀고 나가려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운동을 몸에 습관으로 각인시키면 아이는 운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설령 운동 습관이 들지 않아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면 처음에는 강제성을 띠더라도 운동을 시키는 것이 좋다. 꾸준히 운동하게 되면 몸이 튼튼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얻으며 협동심을 체득할 수 있고 규칙을 이해하며 적당한 경쟁심과 승부욕을 자극하여 자아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 인터넷상의 승부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운동을 통한 정정당당한 승부다. 동물(動物)이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유기체라는 뜻이다. 인간 역시 움직여야 모든 신체 활동이 원활해진다. 그러나 컴퓨터에 붙어 있는 아이는 움직임의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때문에 신체적·심리적으로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현대적 질병의 근원이 움직임의 결핍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운동은 뇌에서 중독성을 기록하는 부분을 현저하게 줄어들게 하면서 생리적으로 중독 현상을 완화시킨다.
둘째, 앞서 말할 것처럼 요즘 아이는 시각 매체의 세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게임에 집착하는 아이를 아이의 눈높이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잔소리가 아닌 아이와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며, 부모와 소통이 원활한 아이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부모는 아이에 대한 보살핌의 개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고 해서 부모는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아이가 물질적으로 충족됐다고 해서 부모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다.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물질적 풍요는 겉으로는 아이가 부족한 것 없는 환경인 것 같지만 정신적으로 더욱 목말라하고 황폐해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결핍의 경험은 미래를 위해 쓰지만 유익한 약이 될 수 있다. 물질적 결핍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아무런 훈련 없이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준비 없는 달리기를 한다면 과연 아이는 얼마나 오랫동안 달릴 것이며, 장애물을 만났을 때 주저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컴퓨터를 사 주었다고 해서 다음의 일을 방치한다면 부모는 역할을 거꾸로 행하는 꼴이다.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설치했다면 이제부터 부모는 역할이 더욱 커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컴퓨터에 대한 아이의 열망과 게임에 대한 흥미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아이가 컴퓨터에 대면하는 순간부터,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부터 부모는 부모다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시험받게 된다.
넷째, 만일 아이가 중독에 빠졌다면 부모는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아이의 시선으로 아이의 게임 세상을 보아야 한다. 왜 우리 애는 컴퓨터 게임을 밤새도록 할까? 컴퓨터 게임 없이는 살맛이 나지 않은 것일까? 도대체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아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게임이 과연 어떤 게임인가를 실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게임을 아는 것에서 벗어나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엄마가 아이와 나란히 앉아 아이로부터 게임을 배우는 것이다. 아이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엄마나 아이에게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처음에 아이는 엄마의 제안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와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을 낯설어한다. 안 하던 짓을 하기 때문인데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누군가가 침입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때 엄마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너의 컴퓨터 중독 습관을 고치기 위해 엄마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섰다는 인상을 준다면 아이는 엄마와 나란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컴퓨터 앞에 너와 나란히 앉는 것은 네가 좋아하는 것이니만큼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 정도가 되어야 한다. 만일 엄마가 진짜 컴맹이라면 처음부터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 하는 아이에게 힘든 작업이 될 것이므로 어느 정도 컴퓨터를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게임에 접속하고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하게 되는 순간 아이와의 소통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인내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아이보다 엄마다. 마우스와 키보드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복잡한 게임에 처음 접하게 되면 흥미를 느끼기가 여간 쉽지 않다. 따라서 엄마는 아이에게 진정으로 배워야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쯤에 도달하면 아이는 약간은 흥분한 상태가 되어 신이 날지도 모른다. 엄마를 자기의 세계에 들이닥친 침입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파트너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보는 방식으로 소통의 장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크게 개의할 필요는 없다. 시각 매체에 익숙한 세대의 소통 방식은 얼굴 대 얼굴을 마주하는 방식이 아니다. 요즘은 젊은 남녀가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문자를 날리거나 폰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그들에게 게임을 통한 만남은 과거 부모가 다방에서 대면했던 만남과 큰 차이가 없다. 엄마가 아이의 소통 방식을 이해한다면, 직접 불러 앞에 앉혀놓고 훈계를 하듯이 소통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금방 깨달을 것이다. 엄마가 서서히 게임에 몰두하게 되면 아이와 동반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엄마도 아이처럼 게임의 재미 속에 빠져들고 게임의 속성을 이해하게 된다. 게임이 갖고 있는 이야기의 흥미로움, 점점 상승하는 레벨을 통한 자아 성취감을 느낄 것이며,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임의 특성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신이 난 엄마는 게임 중에 전화가 온다거나 인터폰이 울리더라고 게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식사 때가 되었다고 해도 게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게임에 빠지면 식사마저도 컴퓨터 앞으로 가져오고 밤을 하얗게 새기도 한다. 그만큼 게임은 인간을 집중시키는 마력이 있다. 누가 게임이 아니면 밤을 새울 것이며 먹을 것을 등한시할 것인가.
이제 게임의 강력한 마력을 체험한 엄마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면서 숙고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아마도 강압적인 봉쇄보다는 게임을 하되 적절하게 시간을 조절하도록 배려할 것이다. 게임의 속성을 파악한 엄마라면 게임 시간을 정하기보다는 게임의 판수를 정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한번 접속하면 몇 판의 게임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 판만큼 게임을 했을 때 스스로 게임에서 나와 컴퓨터의 전원을 끄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아이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엄마의 제안에 반기를 들 리가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 이로부터 아이를 이끌 때 아이는 귀를 닫지 않는다. 이제 엄마는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에게 밥 먹으라고 고함을 치거나 컴퓨터를 끄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곁에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현재 진행 상황이 어떤지 언제쯤 판이 끝날지 점검할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이번 판이 끝나면 식사를 하자고 제안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중간에 멈출 수 없는 게임의 특징을 이해한 덕택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아이가 자발적으로 게임을 끝냈을 때 적극적으로 칭찬(보상)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 아들(딸)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던가... 네가 컴퓨터를 알아서 끄다니 참으로 장하다든가... 아낌없는 칭찬이 필요하다.
영화 <카드로 만든 집>(House of Cards, 1993)이 있다.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딸이 충격으로 입을 닫아 버리고 자폐 증세를 보인다. 건축사인 엄마는 이러한 딸을 자폐적 공간에서 현실적 공간으로 이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어느 날 아이는 카드로 기묘한 형체를 구축한다. 엄마는 이를 다각도에서 카메라로 찍어 보관하고 컴퓨터에 입력시켜 하나의 건축물을 만들어 낸다. 이 형체는 아이의 갇힌 세계였던 것이다. 엄마는 자재를 가져다가 아이가 만들었던 나선형의 구조물을 실제로 만든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그곳에 이르러 결국은 아이를 자폐적 세계에서 현실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아이를 건전한 사회성을 지닌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그 아이의 갇힌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며, 아이를 이끌어 함께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지배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는 것이 아니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고픈 아이에게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넘어진 아이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다. 컴퓨터 중독에 빠진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은 그 세계속에 들어가 그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아이를 현실로 인도하는 것이다. 손을 꼭 잡아줘도 좋고 앞서서 걸어가도 좋다. 이제부터 아이는 부모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부모의 소리를 잔소리로 듣지 않을 것이며, 대화의 상대로 생각할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형제가 많은 집 아이는 컴퓨터 게임중독에 빠질 위험이 거의 없다. 중독될 시간적·공간적 여유도 없다. 사실은 이것은 사족이 아니라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중독 예방책일 수 있다. 아이들이 많은 집에서는 컴퓨터를 독점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형제들은 현명하게도 컴퓨터를 차지하는 순번과 시간을 정할 것이다. 밤새워 컴퓨터에 매달릴 수도 없거니와 여럿이 노는 재미에 흠뻑 빠진 형제들은 컴퓨터 게임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여럿의 자녀는 컴퓨터 게임 중독의 예방차원에서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