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동차를 보면 심리가 보인다

에세이

by 인산

프랑스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자동차의 겉모습에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차 공간이 부족한 그들은 자동차들이 꼬리를 무는 일명 개구리 주차가 주를 이룬다. 앞뒤에 여유가 없는 주차 공간을 빠져나올 때, 앞차 한번 부딪히고 뒤차 한번 부딪히면서 공간을 확보한 후 유유히 빠져나온다. 그들은 서슴없이 범퍼는 부딪히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약간의 흠집이라도 생겼다면 당장 보상하든지 보험처리를 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를 하나의 교통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스인과는 달리, 사유재산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자동차 외관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실내도 멋지게 장식한다. 프랑스에서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리는 낡고 오래된 자동차를 자주 목격할 수 있지만 한국의 자동차는 대체로 흠집도 없고 상태가 양호하다.


한국인은 자동차가 곧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를 보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 정도를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무리해서 큰 차를 장만하려고 한다. 값비싼 자동차를 몰고 다녀야 대접을 받는 사회가 한국 사회인 것이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는 작은 차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뜨거운 여름날, 부부가 에어컨 없는 차를 몰고 가는데 옆자리의 부인이 남편에게 창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남들이 보기에 창문을 열면 에어컨이 없는 싸구려 차로 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부부는 찜통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다는 이야기다. “남 보기에”는 한국의 체면 문화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남한테 확실하게 보여주는 밖에서 굴러다니는 재산 1호 자동차는 체면 문화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인 것이다.


한때 소형차의 대명사였던 된 티코가 출시되자 ‘티코 시리즈’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람들은 조그만 차가 달리는 것이 신기했던지 티코를 빗대어 유머를 쏟아냈다. 프로이트는 유머란 무의식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소형차를 놀리듯 빗댄 티코 시리즈를 보면 한국인 무의식의 자동차 관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도로 위의 심리학


집집마다 한두 대의 자동차가 있는 상황이고 보면 현대사회에서 자동차 없는 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동차는 문명이 가져다준 커다란 혜택이다. 오염이나 교통사고 같은 역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뭐래도 자동차는 현대생활의 필수품이다. 자동차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걸맞은 도로가 있어야 한다. 성능이 좋은 자동차가 마음껏 달리도록 도로를 확장하거나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겨나고 있다. 신이 난 자동차들은 새로 깐 아스팔트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자동차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운전자의 엄청난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운전은 독백의 시간


운전자들 가운데 운전을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다. 운전은 독백의 시간이다. 그 독백은 대개 차창 너머의 다른 운전자를 향한다.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지만 혹시라도 욕먹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간단한 실험으로 실컷 욕을 먹을 수 있다. 소통이 원활한 고속도로 1차선을 시속 80킬로 정도로 여유 있게 달려보라. 시속 120킬로 이상으로 바람같이 달려드는 운전자의 엄청난 욕설이 불 보듯 뻔하다. 그의 욕설이 직접 들리지는 않겠지만 자동차의 움직임을 보면 얼마나 불쾌한 심정으로 운전을 해대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이빔을 번쩍거린다든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린다든가 아니면 바짝 붙여 위협하는 운전자도 있다. 성질이 괄괄한 운전자는 우측 차선으로 추월하면서 느림보 운전자를 째려볼 것이며, 창문을 내려 시비를 거는 운전자도 있을 것이다. 빠르기를 자랑하듯 추월 경쟁이 불가피한 도로는 온갖 시끄러운 말들과 예민한 신경전이 폭죽처럼 터지는 장소다. 소머즈처럼 귀가 발달한 운전자가 있다면 온갖 욕설을 듣겠지만 자동차 소음에 묻혀 욕설이 귀에 전달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따금 고속도로에서 추월선인 일 차선을 평균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 이 차선이 비어있는데도 주행선과 추월선의 개념이 없는 것처럼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는 차들은 느림보 차에게 한 마디씩 하면서 우측 차선으로 추월한다. 일 차선 운행자의 심리는 무엇일까? 운전이 미숙해서일까. 그럴 수 있다. 초보운전자에게 제일 힘든 것은 차선을 바꾸는 것이다. 막 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라면 차선 바꾸기에 자신이 없어, 그냥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신은 명시된 속도를 준수하고 있으므로 다른 차들이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추월하는 차들은 속도를 위반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리듬이 중요한 고속도로에서 자기중심적인 운전은 위험하다. 특히 고속화된 도로에서 속도는 전체의 리듬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차들의 속도와 조화를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


운전자는 왕이다


자동차에서는 핸들을 쥐고 있는 사람이 왕이다. “엿장수 맘대로”와 “운전사 맘대로”는 같은 의미다. 핸들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만큼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권력자라는 의미다. 나의 손이 핸들을 살짝만 돌려도 자동차는 방향을 바꾸고 나의 발이 브레이크를 밟으면 속도가 준다. 자동차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이 바로 운전자 자신이다. 이보다 더 큰 권력이 있을까. 권력자로서 운전자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핸들을 쥔 운전자는 외부와 격리된 닫힌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두운 밤 혼자서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악플러의 심리와 유사하다. 혼자만의 닫힌 공간이란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상태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금지된 언행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단단한 참호 같은 곳이다. 운전하는 방식이 평소 그 사람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핸들만 잡으면 난폭 운전자로 변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자동차가 운전자를 권력자로 만들어주고, 또 운전석이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의식한다면 기꺼이 자신을 억제하겠지만 혼자라고 생각하면 억압되었던 본심이 표출된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저쪽 밝은 곳을 응시하는 관찰자가 될 때, 융이 말한 그림자(shadow)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밝은 낮에는 억눌려 있던 그림자가 혼자만의 공간에 있게 될 때, 연기처럼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온다. 어둠 속의 관찰자는 관음증 환자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 자신을 감추고 은밀한 시선으로 타인을 관찰하는 심리적 지배 위치는, 악플이라는 무기를 지닌 지배자로서 머뭇거리지 않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용기가 생겨난다. 파리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사람이 그림자의 지배를 당하게 되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처럼 무시무시한 하이드로 변신한다. “낮에는 성실한 회사원, 밤에는 강도” 이러한 종류의 인터넷 뉴스를 접할 수 있는 것은 관음증적 상태로 빠져드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다. 평소에 얌전하던 그(녀)가 자동차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빵빵거리며 죽으라고 액셀을 밟아대는 것은 이러한 심리적 결과다.


“열 길 물속 깊이는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알기가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평소의 모습이란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모습, 즉 페르소나이므로 속마음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의 본모습은 핸들을 잡았을 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진면목은 여럿이 함께 있을 때의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통합된 결과다. 따라서 율곡이 언급했던 “혼자 있을 때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신독(愼獨)의 의미처럼, 혼자만의 공간에서 타인을 바라보더라도 진정으로 그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브레이크의 미학


개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속도가 있다. 밥을 먹을 때도 빠르게 먹는 사람, 늦게 먹는 사람이 있다.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빨리 걷는 사람도 있다. 말을 빨리하는 사람 천천히 하는 사람, 성격이 급한 사람 느긋한 사람이 있다. 고유한 속도는 그의 삶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자기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가 새로운 속도를 겪게 되면 그 낯섦으로 인하여 감각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의 속도에서 이탈했을 때 특히 좀 더 빨라졌을 때 평소의 감각과는 다르게 다가오므로 매력적인 느낌이 생겨난다. 일상에서 속도감을 주는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다. 좀 더 모험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오토바이를 즐길 것이다. 그런데 이륜의 오토바이는 속도가 빨라 매우 위험한 교통수단이다. 젊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오토바이나 스포츠카를 즐기는 것은 습관에서 벗어난 속도감이 촉각을 통해 상큼한 쾌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와는 달리 몸이 공기 중에 노출되는 오토바이가 모험을 즐기는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며, 오픈카를 선호하는 것도 바람과 새롭게 접촉하기 위해서이다. 평소의 느낌과는 다른 바람과 피부와의 만남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전율을 일으킨다. 자전거 역시 예외적인 속도감을 주지만 오토바이나 자동차에 비해 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안정감을 주면서 운동의 효과도 있는 자전거는 유쾌한 스포츠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자전거를 탈 때 상쾌함을 느끼는 것 역시 바람과 피부의 낯선 접촉 덕택이다. 평소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인해 생겨나는 바람과 피부의 접촉은 걷거나 뛸 때는 느낄 수 없는 이상야릇한 촉감을 준다.


자동차의 성능 중 중요한 것은 속도다. 얼마나 빠르게 순간적으로 속도를 낼 수 있는가에 따라 자동차의 성능이 결정된다. 그러나 빠른 속도는 운전자에게나 다른 자동차에게 위험하므로 도로 곳곳에는 속도를 제지하는 속도 측정기가 설치되어 있다. 빠르게 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동차를 만들어 놓고 너무 빠르게 달리지 못하게 측정기를 설치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재미있는 것은 과속 운전이나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은 도로 어디에 측정기가 설치되어 있는지 환하게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운전자는 속도 측정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바 없다. 신경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여유 없는 사람은 도로 정보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여유가 있는 운전자는 그것보다는 생각도 정리하고 음악도 들으며 한가롭게 운전할 수 있다. 여하튼 도로에서 속도를 제한하는 까닭은, 적당한 속도로 달리면 기분도 좋고 다른 운전자를 위협하지 않으며 유쾌하게 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짝만 힘을 주어 액셀을 밟으면 속도가 올라가는데 그걸 참고 견디어 내기란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운전자는 기회만 닿는다면 액셀을 더 세게 밟고 싶어 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구다. 윙윙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속도가 높아질 때 존재감을 드러내고 감각적인 쾌감이 생겨난다. 그러나 쾌감과 전율을 선사하는 위험한 질주는 목숨을 담보로 한다. 인류의 조상을 에덴동산에 살도록 했으면 그냥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왜 하필이면 그곳에 선악과를 심어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쾌감에는 항상 위험이 뒤따른다.


자동차의 중요한 장치 중 하나는 브레이크다. 운전자의 생명은 브레이크에 있다. 운전자가 마음 놓고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은 없다. 자동차에는 액셀과 브레이크가 나란히 있어 오른발로만 제어하게 되어 있다. 오른발 하나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제어한다는 것은 동시에 조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기야 앞으로 나가려는 것과 멈추려는 것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이처럼 동력장치와 제어장치의 리드미컬한 조합은 자동차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운전하도록 해 준다. 브레이크가 있기에 액셀을 밟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교훈은 크다. 속도를 더해주는 장치와 줄이는 장치의 조화로운 조합은 우리 삶에서 리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준다. 운전자는 자기도 모르게 오른발로 춤을 추듯 스텝을 밟으며 리듬을 탄다. 그 리듬 덕택에 앞 차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안전운전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리듬이 바로 삶의 리듬이다.


양보하지 않는 심리


자동차가 개인의 체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운전자가 양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일상의 양보와 자동차의 양보는 성질이 다르다. 운전 중 양보는 성능의 문제,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존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옆 차선을 달리던 차가 들어오겠다고 깜빡이를 넣으면 오히려 차를 앞차에 바짝 붙인다. 절대 끼어들지 못하도록 조금만 틈새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실 운전을 하다 보면 가끔 얌체 운전자를 만난다. 꼭 신호등 같은 법적인 규제가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키면서 운전하면 피차 기분 좋게 운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떤 차는 추월하겠다는 욕심으로 끼어들기를 감행한다. 이럴 때 앞차 운전자는 자존심을 떠나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오기가 발동한다.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밀려온다. 이 순간에도 도로 곳곳에서 끼어들려는 자와 끼어 주지 않으려는 자의 심리 전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단언하건대 자동차가 존재하는 한 이런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은 차에게 추월당하면 기분이 상한다. 교통법규 중에는 작고 싼 차가 크고 비싼 차를 추월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작고 낡은 차라도 얼마든지 고급 승용차를 추월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고급 승용차의 운전자는 낡고 작은 차에게 추월당하면 약한 자와의 싸움에서 진 기분이 든다. 자동차의 성능은 운전자의 운전 실력과는 별개다. 작은 차라도 능숙한 운전자는 빠르게 달리 수 있으며 비싼 차라도 서툰 운전자라면 빠르게 달릴 수 없다. 그런데도 추월을 당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힘이 주어질 때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지배 본능이 숨이 있는 것 같다. “나의 사회적인 지위가 이만큼인데, 나의 부가 이 정도인데 감히 나를 추월해!” 미꾸라지처럼 잽싸게 추월하는 작은 차를 보면서 마치 아랫사람에게 무시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가 생겨난다. 그래서 “운전은 도 닦기”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차창 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승용차를 운전할 때와 옆자리에 앉을 때, RV에 승차했을 때, 버스를 탔을 때, 동일한 도로를 달린다 해도 차창 밖의 풍경이 새롭다. 주의 집중도와 차의 높낮이에 따라 시야가 달라져 나타나는 현상이다.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어떤 날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 처음 보는 것 같은 풍경도 있다. 자동차의 높이가 약간만 달라졌을 뿐인데도 전체 시야가 달라진다.


심금을 울렸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교육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던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학교 측에 밉보인 교사가 부당하게 퇴출당하자, 학생들이 책상에 올라가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친다. 관객은 그들이 책상에 올라간 이유는 잘 안다. 매일 의자에 앉아 공부만 하던 학생들에게 책상에 올라가서 다른 시각으로 세상 보기를 권했던 키팅 교사의 가르침을 학생들이 실천한 것이다. 학생들의 책상에 올라가기의 행위는 단순히 높은 곳에 오른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행위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어른 세계에 대한 반항이다. 굳어버린 어른 세계에 반해 수시로 변하는 시각을 인정할 줄 아는 유연성의 가치를 보여준다. 이는 또한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다른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세계와 접촉해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와 만난다. 책 읽기와 여행을 권하는 것은 시각의 다양화를 위한 것이다. 자동차의 높이에 따른 시각 차이가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많이 읽고 생각하고 세상을 넓게 접하는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차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 있는 운전자인 것이다.


자동차의 시각이 주는 교훈이 또 하나 있다. 안전하고 여유 있게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봐야 한다. 자동차는 속도가 있으므로 멀리 보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렵다. 또 시야를 가까이 두면 어지럽고 멀미도 난다. 멀미라는 신체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근시안의 시선은 우리의 삶에서 가능한 한 찬찬히 멀리 볼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

keyword
이전 13화게임 공화국, 한국의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