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인간 역시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 마치 “왜 사냐 건 그냥 웃지요”라는 시구처럼 마땅한 대답 대신 미소로 얼버무리기도 한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막상 그 본질에 다다르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는 태도에 가깝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인종, 문화, 성격, 기질, 취향, 목표에 따라 각기 다르기에 하나의 정답을 고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행복의 척도를 고려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제 질문의 방향은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로 향해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말 그대로 의미가 풍부하고 충만한 삶이다. 의미가 충만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면서 많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특히 한국인의 행복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과정이 혹 어려운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의 의미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누구나 애착이 가는 특별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태어난 곳, 학창 시절을 보낸 곳,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곳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곳이 된다. 아무런 관계가 없던 도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면 그 지명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며, 의미 있는 도시로 변화하는 식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대부분은 나와 아무런 관계나 의미가 없지만, 만약 그중 누군가가 직장 동료라면 붐비는 지하철에서의 우연한 만남도 반가울 것이다. 직장 동료는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커지며, 친지와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자연물도 예외는 아니다. 푸른 숲의 나무들을 보며 심호흡하고 정기를 들이마시지만, 숲속의 모든 나무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직접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면 어떨까? 그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자신이 심은 나무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나무가 잘 자라는지 매일 들여다보고, 정성껏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거름을 줄 것이다. 나무가 시들면 슬픔에 잠기고, 꽃이 핀다면 그 어떤 꽃보다 반가울 것이다. 그 나무가 바로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직접 만든 음식은 인스턴트식품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족들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면 만든 사람은 행복감을 느낀다. 이는 음식을 직접 만들었고, 그 음식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개인의 삶이 풍요로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고, 나무를 심는 행위들이 그렇다. 친구를 사귀고, 여행을 하고, 새로운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것 또한 삶에 의미를 더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의미와 '길들이기'의 상관관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린 왕자와 여우의 에피소드는 '의미 만들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서로를 전혀 몰랐던 어린 왕자와 여우는 우연히 만나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게 된다. 이제 여우는 그 시간이 되면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다. 만약 그 시간에 어린 왕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여우는 실망하고 걱정할 것이다. 이는 어린 왕자와 여우 사이에 의미가 생겨났고, 여우의 표현처럼 '길들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길들인다가 뭐야?"라고 묻자 여우는 "길들이기는 관계를 맺는 뜻"이라고 답하며 덧붙여 말한다.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과 다를 바 없어.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길들인 관계가 형성되면 어린 왕자와 여우 사이에는 하나의 의미가 생겨난다. 밀을 먹지 않던 여우에게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 밀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는 이제 밀밭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금빛 밀밭은 금발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밀은 금빛이니까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밀밭이 새롭게 다가오고 특별한 의미가 생겨나자 여우는 행복해한다.
이러한 예시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전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있다면, 관계가 맺어진 그들에게 그 시간은 특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만약 그 시간에 전화가 오지 않으면 '길들여진' 사람은 당연히 걱정할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간이 두 사람의 약속으로 의미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사람과 사물이 수두룩하다. 전혀 모르던 사람과 우연히 만나 긴밀한 관계가 형성될 때, 그가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조차 싫고 그 없이는 삶이 공허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 존재일 것이다. 그로 인해 인생은 의미로 가득 찬 새로운 인생이 된다.
의미는 꼭 크고 중요한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친구가 준 연필 한 자루도 커다란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린이가 상자 속에 모아둔 구슬이나 딱지는 어른에게는 쓸모없어 쓰레기통에 버릴 만한 것이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어린 자녀가 정성껏 그린 그림을 귀가한 아빠에게 선물로 내밀 때 절대 그 그림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버리기를 아까워하는 노인의 물건을 젊은 며느리가 마음대로 버려서도 안 된다. 그 물건이 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 무의미하다고 버린다면, 이는 보이지 않는 무기로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것과 같다.
의미와 이름
의미는 이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인간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본래 이름 없던 사물에 인간이 기능이나 형태에 따라 이름을 부여하면서 의미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름 붙이기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그 의미는 훨씬 복잡해진다. 사람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인격과 정체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름의 형태는 국가, 민족, 사회, 문화에 따라 다양하며 각기 다른 유래, 의미, 이유를 갖는다. 이름은 문화적, 사회적 산물이자 개인의 인격과 개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는 훈련소나 교도소에서는 이름 대신 계급이나 번호를 사용한다. 때로는 이름이 그 사람 전체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나와 전혀 무관한 이방인이며, 수많은 무명의 군중 속 한 사람일 뿐이다.
이름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홀로 존재하는 이에게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회성을 지닌 이름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 이름이 나에게 다가올 때, 그는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된다.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나와 그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름은 실존을 의미하며, 타인의 이름을 알거나 부르는 행위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생겨났음을, 즉 길들여졌음을 뜻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개성이자 정체성이자 실존이다. 잊힌 자는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으므로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름은 단순히 사람이나 사물을 명명하는 것을 넘어, 혼과 생명, 영혼을 담고 있다. 김소월의 시 <초혼>(招魂)은 이 점을 분명히 상기시킨다.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여 다시 살리려는 의식이며, 혼을 부르는 절규는 바로 이름을 통해 이루어진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 중(虛空中)에 헤여진 이름이어!
불너도 주인(主人) 업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초혼>은 과거 농경 생활을 기반으로 한 한국 문화에서 대가족 제도가 필연적이었고,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 간의 긴밀한 관계가 매우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관계는 소중하며, 이를 언어로 표현한 이름이야말로 그 사람의 본질이다. 죽은 자의 이름은 산산이 부서져 버린 이름이다. 아무리 불러도 주인 없이 메아리만 전해오는 이름은 의미가 없다. 이름이 주인을 되찾았을 때 비로소 그는 생명을 얻고, 나와 새로운 관계가 정립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 1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처럼, 서로를 알기 이전, 이름을 불러 관계를 맺기 이전에 그(녀)는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녀)는 나에게 무의미한 존재다.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그들은 그저 하나의 사물 혹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만남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의미가 생겨날 때 그(녀)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된다. 내가 그(녀)를 인식할 때 그(녀)가 존재하게 되고, 그로부터 나의 존재가 확인된다. 두 사람이 상호 교감을 이루고 각자의 삶에서 의미가 생겨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다워진다. 이 점은 <꽃>의 2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식했음을,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가 생겨났음을 뜻한다. “나에게로 와서”는 그(녀)가 내 의식의 자장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길들이기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왔고, 죽었던 존재들이 살아나 움직이고 숨 쉬게 된 것이다. 의미로 가득한 삶은 서로가 기대고 서로가 불러주는 삶이다. 이는 너로부터 인식되어지고 싶은 나,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픈 욕망을 표현하는 <꽃> 3연과 부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이가 그녀를, 또는 그녀가 그이를 인식하고 관계가 맺어져 이름을 불러 주었다면, 내가 그의 꽃이 되고 나의 실존이 가능해진다. <꽃>의 마지막 연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무엇인가 되고 싶은 우리는, 다른 말로 의미를 지닌 존재로 살고 싶은 욕망이다. 너와 내가 길들여진 관계 맺음을 통해 의미를 만들고, 이로부터 실존에의 열망과 영원한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
의미치료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끔찍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삶의 고통 속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의미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랭클이 깨달은 건 인간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고, 이를 추구할 자유도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끝없이 의미를 좇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초월해가는 존재다.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래 전통 철학은 본질주의였지만, 사르트르는 이를 뒤집어 인간에게는 실존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로 세상에 던져지는 실존적 존재이며, 성장하면서 백지에 자신의 본질을 하나씩 써 내려간다.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형성해야 하는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지니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따른다. 아마도 인간에게 본질의 형성은 프랭클처럼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일 것이다.
다행히 인간은 일상의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려는 강한 본성을 지닌다. 그저 바위 덩어리에 불과했을 거대한 돌에 부처상을 새기면 그 돌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 십자가를 만들면 그 나뭇가지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프랭클은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면 실존의 문제에 직면하고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표출하여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질병은 치유될 것이며, 진정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야말로 참된 가치를 지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보다 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또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삶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의미를 만들어주는 자원봉사 역시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