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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에세이

by 인산

2007년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개봉되었다. 스릴러와 로맨틱, 드라마와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노인 문제를 다룬 약간은 색다른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킬러와 살인, 쫓고 쫓기는 액션으로 영화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럼 왜 제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제목과 줄거리의 연관관계를 찾아보려 했겠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헛되이 범인을 쫓던 은퇴를 앞둔 보안관과 늙은 옛 상사와의 대화는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옛 상사는 말한다.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게 바로 허무다.”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된다. 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노인이 되기까지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영화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는 개인의 이권에 의해 함몰된 인간들로 득실거린다. 삶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향일성 동물일 뿐이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방종했던 과거를 되돌아보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에너지도 열정도 사라졌다. 그저 떠들썩한 소리를 지르며 부패하고 부조리한 행동을 일삼는 젊은이를 씁쓸하게 바라볼 뿐이다. 저들도 조금 있으면 나와 같이 되리라. 영화에서 옛 상사의 시선은 이 같은 악순환의 굴레에서 결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슬픈 메아리를 전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제목을 뒷받침해주듯 한때 ‘지하철 막말남’, ‘지하철 페트병녀’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노인에 대한 젊은 사람의 폭언과 폭행 장면을 고스란히 전송하고 있는 동영상은 진정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였다.




농촌 할머니들 집단을 만난 적이 있다. 이 만남에서 농촌 같은 시골에는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일단 농촌 인구는 대부분 노인이 차지하고 있다.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으로 농촌 인구 고령화율(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55.8%로 전체 인구의 고령화율(19.2%) 보다 월등히 높다. 농촌에서 65세 이상이 절반 이상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들 중 칠팔십 퍼센트는 나 홀로 가정이다. 평균적으로 여자수명이 길다 보니 나 홀로는 주로 할머니들이다. 한 번은 “혼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이에요?”하고 물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들이었지만 할머니들은 속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그중 명랑한 한 할머니가 “등짝에 파스 붙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낮에 일하고 등이 시큰거려 파스라도 하나 붙이려면 손이 닿지 않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벽에다 살짝 파스를 걸쳐놓고 등을 벽에 들이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잘되지 않는단다. 할머니들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영감이 필요해” 하였다. 함께 웃으며 분위기는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그 말속에는 노년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 있어 내심 마음이 아팠다. 농촌 할머니들의 나이는 대략 칠팔십 대가 주를 이룬다. 얼굴은 시커멓게 탔고 손톱은 볼썽사납게 문드러졌지만, 칠팔십 대 할머니들은 여전히 밭에 나가서 농사를 짓는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할머니들은 도시에 있는 자식에게 얹혀살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혼자 살다가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없게 되면 인근 노인시설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어느덧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과거 양로원에 들어가듯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할머니마저 떠나면 빈집이 되기 때문에 지금 농촌에는 빈 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더운 여름날 할머니들은 점심때가 되면 마을회관에 모여든다. 더워지기 전에 아침 일찍 들에 나가 일하고 점심때 잠시 쉬었다가 오후 네 시 이후에 다시 일하러 간다. 나름대로 뜨거운 시간대를 피하는 일과이다. 이러한 일상에서 농촌의 노인들은 의미 있는 일을 찾거나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금의 노인들은 내심 서운하고 원통한 마음을 갖고 있다. 자신들은 한국이 한창 성장할 때 주역이었으며 당시에 부모를 모시고 공경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의해 내팽개쳐졌다고 생각한다. 연금 혜택의 사각지대이자 노인 공경 풍토가 사라지는 시점에 서 있는 자신들이야말로 변화의 과정에서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추석 명절이 다가오자 “명절이 기다려지지요?”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손자 손녀를 만날 수 있는 명절이 즐겁지 않으세요?”하고 재차 묻자 “그것은 좋은데... 자식 며느리들 눈치 보고 음식 장만하고 하는 것들이 즐겁지만은 않다”라고 말한다. 젊었을 때 호된 시집살이를 했고 지금은 젊은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는 전형적인 낀 세대의 모습이다. 기분도 전환할 겸 “가장 소중하고 비싼 금이 어떤 금일까요?”하고 퀴즈를 냈다. 할머니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황금, 백금, 순금 등을 외쳤다. 그게 아니고 난센스 퀴즈라고 하는데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해 보세요 하고는 대학생들 이야기를 하였다. 2년 만에 졸업하는 전문대학의 학생은 첫해는 신입생이 되고 두 번째 해는 졸업예정자가 된다. 그런데 학내의 모든 행사에 2학년은 뒷짐을 지고 있고 1학년들이 도맡아 행사를 진행한다. 스물한 살의 2학년들은 곧 졸업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마치 정년이 되어 은퇴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스물한 살의 선배가 스무 살 후배에게 애늙은이 행세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30대는 20대를 그리워하며 40대는 30대를 그리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70세 할머니는 한 십 년만 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80세 할머니는 70세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들은 다들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 제일 소중하고 좋은 시절이란 과연 언제일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지금”이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렇다고 하면서 가장 소중하고 비싼 금은 ‘지금’이라고 말했다. 이 난센스 퀴즈는 누구나 그리워하는 과거가 있지만 바로 이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허리와 무릎이 아파서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지만, 밭에 가면 억척스럽게 일을 해내는 할머니들에게 “9988234”라는 말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과 죽음이라고 하자 다들 동의한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큰 소리로 9988234를 외쳤다. 이삼일은 앓아야 하는 까닭은 그래도 자식이 올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앓는 시간이 두세 시간이면 본인한테는 제일 좋겠지만 자식한테 도리를 할 기회를 주어야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老人)이라 함은 늙거나 쇠한 사람을 일컫는다. 한자의 노(老)는 쉬다, 썩다 등의 뜻이 있으며 치사(致仕)하다,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다 등의 뜻도 있다. 대체로 늙을 노(老) 자는 좋은 뜻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긴 늙으면 그 자체로 서럽다는 말이 있다. 한때 당당한 젊음을 자랑했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시들해진다. 아름다운 자태로 뭇사람의 관심 대상이 되었던 화려한 꽃이 시들해지면 관심사에서 벗어나듯, 탱탱한 피부와 혈기 왕성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주름과 흰머리만 가득한 노인은 이유 없이 서럽다. 젊은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좋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름답던 청춘이 그리워지니 현재가 더욱 한탄스럽다. 젊은이도 노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으로 모셔야 하고 잔소리를 들어야 하므로 가능한 한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그들도 조만간 노인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긴 현재의 노인들도 젊었을 때는 그랬다. 젊은이가 미래의 노인 모습을 그리는 것은 상당히 언짢은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좀 더 가까워진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젊었을 때부터 차근히 준비한다면, 노인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개인적 혜택을 누릴 수 있고 얼마든지 행복한 노인이 될 수 있다. 결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인생 후반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갈수록 노인이 많아지고 사회문제가 되다 보니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대개는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면 일종의 퇴물 취급을 받는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인생을 정리하고 조용한 말년을 보내고 싶지만 상황과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서, 막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지내는 노인들이 수두룩하다. 나이로 노년기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법률상 노인은 65세부터다. 지하철 무임승차나 노령연금 수령도 65세부터다. 그런데 평균 수명이 부쩍 늘어나 환갑잔치가 창피해진 요즘 65세 정도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닌 아저씨 아줌마로 볼 정도로 건강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노인 65세는 19세기 유럽에서 평균 수명이 50세 정도일 때 정해진 수치이다. 당시 65세는 현재로 환산하면 90세 정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열 살의 반려견을 열 살 아이 취급할 수 없는 것처럼, 발달단계와 평균 수명에 고려하여 노인의 범주를 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한 보험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은 노인의 기준 나이를 대체로 70세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심리적 나이와 실제 나이 차이에 있어, 스스로가 실제 나이보다 젊다고 생각하는 노인이 많았다. 의학이 발달하고 생활환경이 개선됨에 따라 확실히 젊은 노인들이 많아졌다. 또한 연금 제도가 정착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노인들도 꽤 늘어났다. 직장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시간도 많아졌다. 프랑스에서는 나이가 들어 은퇴한 교수들이 은퇴 이후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많은 저서를 낸다. 교육의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연구 활동에 전념하는 그들을 보면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은퇴 노인의 개념을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는 노인이 어떻게 하면 활기차고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신체적으로 노화는 감각 지능이 저하되고 잠이 없어지며 생리적 기능도 감소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기중심적이 되어 가는 노인의 기억력은 감퇴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활발한 두뇌 연구에 따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현재 뇌에 대한 인식은, 근육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근육이 유지되는 것처럼, 뇌를 계속 사용하면 생각만큼 노화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를 계속해서 자극하면 퇴화하지 않는다. 운동을 하면 뇌가 늙지 않는다는 이론이 “뇌 알통 이론”이다. 아령 운동을 열심히 하면 알통이 생겨나듯이 뇌도 열심히 운동하면 건강해진다는 뜻이다. 뇌는 근육과 마찬가지로 유연하다고 알려져 있다. 유연하다는 것은 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퇴화하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듣고 행동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뇌세포를 젊게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EBS에서 뇌 연구의 성과에 대해 <기억력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한 적이 있다. 뇌 학자들은 만일 뇌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훈련한다면 뇌세포 수가 증가할뿐더러 뇌세포 간의 연결고리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뇌의 노화를 예방하거나 노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꾸준히 뇌를 사용하고 자극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들이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작업이나, 하다못해 심심풀이 화투라도 치는 것이 치매 예방이나 뇌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볼 때 노인은 퇴직자이며 가정에서는 조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시기이므로 노년기 심리적 변화는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특징이 있다. 첫째, 노인은 수동적이거나 내향적이 된다. 과거에 외향적이고 능동적이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안으로 움츠러드는 것이 상례다. 내적으로 웅크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이 생겨날 수 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자칫 우울증 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수동적이고 내향적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심리적·신체적으로도 경직된다. 몸이 마음대로 따르지 않으니 미끄러운 눈길을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다른 특징으로 노인은 의존적이 된다. 신체 기능의 전반적인 퇴화, 경제 능력의 약화 등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의존도가 높아진다. 노인을 더욱 약하게 만드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죽음이다. 배우자의 죽음은 가장 커다란 충격이며 수첩에서 친구의 이름을 지워나가는 것은 닥쳐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이다. 배우자나 친구의 죽음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노인에게 사회적 의존성 및 심리·정서적 의존성이 생겨난다. 이러한 의존성은 친근한 사물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노인은 물건 버리기를 아까워한다. 그것은 물건 자체에 자기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거니와, 애착이 가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의존하는 지지대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허망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자식이나 며느리가 보기에는 냄새나고 구멍 난 목도리일 수 있겠지만 노인에게는 누군가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받은 잊을 수 없는 선물일 수 있다. 효도하겠다고 새 목도리를 선물하면서 헌 목도리를 버려 버린다면 노인에게는 오히려 상처가 될 있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노인에게 반가운 시기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선거철이다. 선거철이 되면 너나없이 노인을 찾는다. 평소에는 찬밥 신세였지만 선거 때만 되면 뜨뜻하고 맛있는 밥상처럼 어김없이 파리들이 떼로 몰려든다. 젊은이의 표나 행세깨나 하는 사람의 표나 쓸모없이 여겨지던 노인의 표나 똑같이 한 표이기 때문이다. 이때만은 각종 노인 모임이 활성화된다.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과거에는 노인에게는 선거철이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기간이었다. 관광도 시켜주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선물까지 두둑이 받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제일 좋았던 것은 물량 공세보다는 사람들이 찾아준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외로움을 느끼는 노인들을 찾아와 넙죽 절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선거철이 되면 목소리를 높인다. 그동안 섭섭했던 것을 마음껏 말해도 다 들어주니 폭포수처럼 시원하게 쏟아낸다. 선거철은 노인들 스트레스 해소하는 기간이니만큼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노인이 되면 생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진다. 잔소리가 늘고 간섭하기도 좋아한다. 젊은 사람들이 놀아주지 않아 침묵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


프랑스 유학을 간다면 꼭 조언하는 말이 있었다. 프랑스어 실전을 하려면 공원에 가라는 것이다. 공원에는 할 일 없는 외로운 노인들이 있는데 그냥 인사만 해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다만 노인과 이야기할 때는 반복하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어줘야 하는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아닌 게 아니라 공원에는 외로운 노인들이 참으로 많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지쳤는지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있다. 이게 어디 유럽만의 현상인가. 파고다 공원에는 외로운 노인들이 즐비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나 독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필요하다. 노인들이 공원에 나와 서로 말을 섞는 이유다. 목소리의 결핍은 잔소리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 열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니라 지갑이라는 말이 있다. 잔소리가 많은 것이 노인이고 보면 가능한 잔소리를 줄이는 것이 좋다는 교훈일 터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늘어나는 것은 늙음에 대한 부적응이자 두려움의 산물이다. 또 부족한 대화 시간을 채우기 위해 잔소리라는 결과물이 나온다. 보통 잔소리는 상대방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개입하는 것이다. 감정의 개입 없이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조언이 되지만, 감정이 섞인 어투로 반복적으로 말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잔소리가 된다. 잔소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연구에 의하면 잔소리는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직하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고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뜻이다. 보통 잔소리는 상하 관계에 있어 상에 속하는 사람의 차지다. 대표적으로 부모의 잔소리, 선생의 잔소리, 상사의 잔소리 등이 그것이다. 특히 과거 한국 사회에서 나이 든 시어머니 잔소리는 잔소리의 전형이었다. 대체로 여성이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가 많아진다. 그 이유는 젊었을 때 생각이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또한 아니무스의 증가로 남성화가 되면서 참는 것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결코 바람직한 소통 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을 해도 듣는 쪽에서 잔소리로 듣는다면 자기 말을 점검해 봐야 한다.




상담을 하면서 흔히 인생 그래프를 그리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모습을 그래프로 표기하도록 하면서 행복도가 높았을 시기를 10으로 중간인 시기를 0으로 제일 낮았을 시기를 -10으로 잡고 그래프를 그리도록 한다. 인생 그래프는 자기의 과거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인생 그래프를 그리면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머리에 떠오르는 사건들을 점검하면서 행복했던 시절과 불행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래프의 길이가 길어지는 것을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굴곡이 많다는 뜻이다. 개인의 인생 그래프가 아닌 보편적인 발달단계의 인생 그래프도 있다. 신체와 건강, 사회적 지위와 경제, 경험과 지혜로 나누어 그래프를 그리면 매우 재미있는 그래프가 생겨난다.


인생 그래프를 보면 신체적으로 가장 건강한 절정의 시기는 십 대 후반부터 이 십 대 초반까지다. 수영의 박태환 선수나 피겨의 김연아 선수의 절정기가 이때에 해당한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유는 나이가 들면서 상승하여 40대나 50대에 절정에 이른다. 경험과 지혜는 오래 묵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된장처럼 나이가 들수록 더욱 확산된다. 발달 과정을 신체, 경제, 경험으로 나눈다면 노인의 역할이 시든 꽃처럼 버려질 것이 아니라 경험이나 지혜에서처럼 분명히 크고 중요한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들도 이러한 노인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자아 발달 이론에서 여덟 단계의 이론을 언급한 에릭슨은 인간은 각 발달단계에서 위기를 경험하며, 이 위기를 잘 해결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여덟 단계 중 최종 단계인 제 팔 단계는 65세 이상의 노년기로 에릭슨은 이를 ‘통합’과 ‘절망’이 대립하는 시기로 보았다. 이때는 이미 누구나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심리적·신체적·사회적인 무력감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룰 수 있다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절망을 넘어 인생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면 참다운 통합과 지혜를 획득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노년기인 것이다. 노년기를 만족스럽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지나온 인생을 관조할 수 있다면 자아 통합을 이룬 사람이다.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통합과 절망에 의해 생겨난 지혜를 획득한 사람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노년기를 평가한다. 낮은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높은 단계의 욕구를 의식하거나 동기부여를 한다는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서 피라미드 맨 끝을 장식하는 최종 욕구는 ‘자아실현’ 욕구이다. 그는 자아실현 욕구에 이르는 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나이가 중년 이상이 되어야 가능한 매슬로우의 자아실현자는 마치 산중에서 오랫동안 수련한 고승이 연상된다. 자아실현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본성과 다른 사람들을 수용한다.

둘째, 행동이나 내적 생활, 생각, 충동에도 꾸밈이 없다.

셋째, 자기보다는 외부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넷째, 혼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섯째, 어린애처럼 삶에 대해 경외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여섯째, 환희나 경이로움이나 경외와 같은 신비 체험을 한다.

일곱째, 인간에 대해 강한 감정과 애정을 느끼며 인본주의를 지지한다.

여덟째, 사려 깊고 철학적이며 유머 감각이 있다.

아홉째,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

열째, 부당한 사회적 압력이나 문화 적응에 저항한다.

욕구 단계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자아실현자는 인생을 관조하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자연스럽게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서양 심리학자뿐 아니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노인이 지닌 삶에 대한 관조와 지혜를 높이 평가하는 전통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공자는 인간 발달단계를 자기 삶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여섯 단계로 나눈다. 학문에 뜻을 둔 열다섯, 뜻을 세운 삼십, 미혹됨이 없는 사십, 하늘의 명을 깨달은 오십, 귀가 순해진 육십 그리고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행동을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칠십을 언급한다. 공자의 칠십은 로저스의 팔 단계나 매슬로우의 자아실현자로 보면 딱 맞는다. 74세에 죽은 공자는 이 발달단계를 실제 경험을 통해 터득했을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당시 평균 수명이 오십 정도였을 것을 감안하면 그는 장수한 측에 속한다. 그가 인생 후반기인 오십과 육십과 칠십을 하나로 묶지 않고 세분한 것을 보면 노년기를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프로이트를 위시한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주로 유아기부터 아동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에 비해 공자가 노년기를 세분한 것은 특징적이다.


행복한 노년을 위한 제언


행복하고 성공적인 노년을 위해서는 생애를 마치는 순간까지 포기나 체념을 해서는 안 되며 인생 최대의 만족을 누리는 것을 희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맨 먼저 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이 노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심리적 인정은 앞으로 노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도록 한다. 확실히 인정하고 나면,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고 기죽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마련할 수 있다. 또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소신껏 추진하되, 주머니가 가볍더라도 자신감을 잃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매사에 긍정적인 자존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노인의 고집에서 벗어나 너그러워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타인과의 원만한 교류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난다. 노인이란 일생을 정리하는 성숙한 존재라는 인식도 생겨난다. 한편 노인의 행복한 삶은 노인 됨을 즐기겠다는 자세로 주변과의 관계 변화에 잘 적응할 때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족과 사회의 시선이다. 사회적으로 유용성의 가치가 하락하고 신체 및 지각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노인을 무용한 인간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가족과 사회는 노인이 일정한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하면서 떳떳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국가도 노인의 공로를 충분히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행복한 노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노령연금과 같은 경제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절한 역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인이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때 패물이 아닌 유용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향상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유치원에서 유치원 교사를 젊은 교사와 노인 교사로 섞어 배치하는 것이다. 할머니들은 손자와 같은 어린 유치원생을 돌보면서 활력을 되찾을 것이고 유치원생은 경험이 풍부한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에서 안전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노인들이 재미를 느끼면서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건전한 노인 놀이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노인들에게 자원봉사 기회를 주어 자연보호, 청소년 지도, 기술 전수 등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요즘, 교육은 평생 교육의 개념으로 나가고 있으며 인생 2 모작 혹은 인생 3 모작이 강조되고 노년기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다음의 교훈적 예화들은 인생 후반기에 개인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솔개의 평균 수명은 40여 년이 된다. 그런데 어떤 솔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극복함으로써 건강하게 70여 년을 산다. 보통 40살이 된 솔개는 부리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고 부리도 구부러져 사냥할 수 없게 된다. 날카롭던 발톱은 무뎌지고 깃털도 두꺼워져 날쌔게 날 수도 없다. 사냥하지 못하면 솔개는 굶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솔개는 이러한 노화현상을 체념하지 않고 6개월여 동안 피를 흘리는 고통을 참아가며 구부러진 부리로 바위를 쪼아 댄다. 어느 순간 낡은 부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새 부리가 돋아난다. 솔개는 건강한 새 부리로 무딘 발톱과 두꺼운 깃털마저 뽑아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거듭난다. 날렵하게 하늘을 날게 된 솔개는 다시 사냥하게 될 것이다. 낡은 부리를 바위에 쪼는 행위는 엄청난 고통일 것이지만 이를 극복한 솔개는 생의 후반기를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수의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서 백 세가 된 노인의 인터뷰가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노인은 후회스러운 어조로 백 세까지 살 줄 알았다면 70세부터라도 계획을 세우고 배움에 힘쓸 걸 그랬다고 한탄하였다.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소개된 적이 있다. 다음은 2008년 8월 14일 동아일보의 한 칼럼에 실린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 95번째 생일에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 시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입니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세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는 전반부과 후반부가 있고 그 사이에 하프 타임이라는 휴식 시간이 있다. 축구를 예로 들자면, 전반전에 이겼다고 경기 결과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전반전에 진 팀이 하프 타임 때 열심히 새로운 전술을 짜고 후반전을 준비한다면 얼마든지 승부를 뒤집을 수 있다. 하프 타임을 알리는 휘슬은 경기가 종료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인생 2 모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다. 중요한 것은 솔개처럼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휴식과 재충전 그리고 각오와 전술 및 노력이 필요하다. 전반전에 지고 있다면 즉 만일 과거가 후회스럽다면, 긍정적 변화를 위해 고심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프 타임 때 훌륭한 전략을 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 이모작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몸과 머리와 마음 훈련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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