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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울 때 행복하다

에세이

by 인산

한때 비움의 미학이 성행한 적이 있다. 비우기, 내려놓기를 적당한 시기에 실천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잘 나가는 선수가 은퇴를 선언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내려놓아야 하는 때를 잘 선택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행복을 원한다면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비울 수 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온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가르친다. 무겁게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으면 휴식과 안락이 온다는 교훈을 전한다. 그런데 무엇을 비우라는 것인가.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채워야 할 때가 있음을 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무조건 비우거나 내려놓을 수는 없다.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욕심을 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욕심의 정의도 모호하다. 무엇인가 커다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때, 어떤 것은 꿈이라고 하고 어떤 것은 욕심이라고 한다. 항상 꿈을 간직하고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은 비우는 것과 어떤 관계인가. 혹시 꿈의 실현이 과욕은 아닌가. 비우는 것, 내려놓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를 실천하여 행복의 열매를 맺기는 어렵다.

욕심이란 간단히 “탐내거나 분수에 지나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상황이나 능력에 도를 넘거나 지나치다면 욕심이 된다는 뜻이다. 주머니에 만원이 있을 때 만원짜리 이하의 음식을 먹는다면 욕심이 아니겠지만 만 원 이상의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욕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능력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음식과 음식값이라는 예는 매우 단순화된 상황이다. 여기에 심정을 덧붙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삼천 원짜리 식사로도 충분한 식사가 된다면 굳이 만 원 이상의 음식 메뉴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충분하다는 것은 위의 포만감과 정신적 만족을 다 포함한다. 만 원 이상의 메뉴에 눈길이 가는 것은 그 이하의 가격으로는 신체적·정신적 포만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순간 만 원 이상의 식사를 하지 못한다면 내내 부족한 느낌이 들 것이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며, 불행한 생각이 들 것이다. 금전적 능력이 상황을 다르게 하지만 이 상황을 바라보고 결정하는 것은 결국 마음이라는 것이다. 만원짜리 식사를 하고도 부족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 원짜리 식사로도 포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식사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므로 많은 행복의 전도사들은 때때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명상하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조언한다. 내 마음 나도 몰라가 아니라 내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게 되고 마음의 평화가 온다는 것이다. 정말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람들은 분수를 지키고 과욕도 부리지 않을 것이며 갈등이 사라져 상생의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가능한 많은 것, 가능한 좋은 것을 탐하는 데 익숙하다. 대개는 버리기보다는 채우려고 하며 주기보다는 받으려 한다. 깨달음을 위한 명상이나 기도, 수행의 근본적인 목표는 어느 정도 이러한 물욕의 본성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다. 우리는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능한 한 더 많은 것을 쥐려고 노력한다. 값비싼 양질의 식사를 위해 지갑을 두둑하게 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물질이란 마모되고 쓸데없어지며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맛있고 값비싼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더 비싼 새로운 음식을 찾는 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의 단명성과 중독성은 인간의 역사가 증언하듯 헛된 욕망의 진원지이다. 물질로 자극되는 감각은 끝이 없다. 한계를 모르는 자극적 중독 때문에 사람들은 속절없이 위험천만한 경계를 넘나들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인간의 의지와 행동은 꿈이 아니라 과욕이 된다. 카지노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은 꿈이 아니라 과욕이다. 물질은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한 느낌이 든다. 채움으로 인해 느꼈던 짜릿한 쾌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쉬이 사라지고 다시금 더욱 강한 쾌감을 찾아 나서도록 부채질한다. 물질의 채움을 향해 달려드는 것은 깨진 항아리에 쉼 없이 물을 붓는 행위가 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어코 사라지고야 마는 물질은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더라도 언제든지 빠져나가는 허망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내 손아귀에 물질이 쥐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꽉 붙들고 있으면 채워질 것 같은데 채울수록 붙들수록 마음은 공허해진다.


이처럼 물질의 공허한 원리를 깨달은 선각자들은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바로 비움, 내려놓음의 원리였다. 그들은 물질을 내려놓을 때 묘하게도 오히려 마음이 충만해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 본 사람이 짐을 내려놓았을 때 얼마나 홀가분하고 상쾌한지 그 느낌이 몸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선각자들도 비움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비우기와 내려놓음의 미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이 있다. 그들은 입이 좁은 커다란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미끼를 집어넣는다. 원숭이는 항아리 속에 팔을 집어넣어 먹이를 덥석 붙잡는다. 그때 원주민들은 원숭이를 포획한다. 원숭이가 먹이를 쥐고 있는 한 그 손은 항아리 입구를 빠져나올 수 없다. 현명한 원숭이라면 먹이를 포기하고 달아났을 테지만 대부분 원숭이는 결국 팔을 빼지 못하고 잡히고 만다. 먹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손으로 꽉 움켜쥔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비우기는 행복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물질만능주의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를 잊고 불행한 원숭이처럼 쥐고 채우기에 급급하다.


심리학은 비움의 학문이다


비우기는 심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언급한 것도 결국 비우기를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정신과 의사는 히스테리나 신경증의 환자들을 보면서 이들의 증상이 과거에 입은 상처가 무의식에 잠재되어 그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프로이트가 개발한 모든 임상적 방법은 무엇보다도 무의식을 밖으로 꺼내기 위한 방편이다. 프로이트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우리 속담처럼, 꼭꼭 숨어있는 무의식의 단서들을 찾아 나섰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를테면 꿈이나 유머와 같은 것으로 이것들이야말로 무의식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꿈을 분석하여 환자의 무의식 세계를 엿보았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환자의 저 깊숙한 무의식 속에 매몰되어 있는 상처들, 잊은 것으로 생각했지만 괴물의 형태로 변형되어 어딘가에 잠복한 채 정신 병리적 현상을 유발하는 트라우마를 들춰내려는 목적은 단 하나, 이를 깨끗하게 비워내기 위한 것이다.


이를 단계별로 정리해 보면 첫째 무의식을 추적하여 찾아내기, 둘째 밖으로 끌어올리기, 셋째 정화하기가 된다. 이러한 단계로 진행되는 비움의 방식은 프로이트의 고유한 방식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상 이미 오래전부터 선사시대 훨씬 이전에도 성행했을 터지만, 프로이트가 학문적·의학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후 정신분석학은 심리학과 상담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론이 되었고, 심리치료나 상담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억눌린 무의식의 탐색과 해소 방식은 프로이트가 거둔 성과다.


비움을 향한 축제


기록이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탐구와 비워내기 방식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쌓아 두는 것은 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비워내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하수구에 이물질이 쌓이면 더러운 오물들이 넘쳐난다. 오랫동안 대변을 보지 못한다면 예외 없이 장에 문제가 생긴다. 장을 비워내야 건강한 신체가 된다. 몸에 집어넣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 집어넣는 행위는 어렵지 않지만 비워내기는 어렵다. 식도에서 음식을 넘기는 데 문제 있는 사람보다는 비워내는 데 문제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비우지 못하면 넘치거나 썩어버린다. 불만이 쌓여 있는 사람이 불만을 해소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면 분노로 변하고 행동으로 폭발한다. 분노가 목까지 차오르는데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화병이 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슬픔과 분노는 백지 한 장 차이다. 슬픔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슬픔이 된다. 슬픔을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면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고대 그리스에서 주신인 디오니소스를 찬양했던 디오니소스 축제는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비워야 했던 사회적·집단적 배출 행위였다. 농경문화에서 신과의 교접을 통해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던 디오니소스 축제는 신분과 계급과 빈부의 격차에 따라 형성되었던 계층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이 순간만큼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본능과 야생과 원시에 젖은 몸으로 만나 본능적 몸짓을 주고받았다.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불만의 먼지들과 고착화된 오물 덩어리를 한꺼번에 씻어 내리는 씻김굿을 행하는 무당이자 환자들이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비극의 최종 목표인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으로, 더없이 깨끗한 물로 세정된 몸을 최종 목표로 한다.


이러한 정화의 축제는 과거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민중의 축제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의 의미 이와 끈끈하게 맞닿아 있다. 디오니소스의 축제처럼 남녀노소 각계각층 누구나 참여하는 카니발에서 바흐친이 간파한 것은 자유와 해방이었다. 축제의 순간이 도래하면 기존 질서는 뒤로 물러나고 평소에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타부들이 속속들이 행해진다. 법과 전통은 뒷짐 지고 무질서 속에서 원시적 기운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마음껏 발산된다. 자유와 해방 속에서 권위와 엄숙은 추락하여 조롱의 대상이 된다. 성직자와 부랑자들이 한데 어울려 어깨를 잡고 춤을 추며 안방 규수와 냄새나는 걸인이 열렬히 포옹한다. 질서를 파괴하고 상식을 해체하는 카오스의 카니발은 일차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배출하는 통로가 된다. 욕지기의 고함과 더러운 오물 투척이 난무하는 카니발이 정화의 수단이 되는 것은 비움의 원리이다.


무질서한 카니발 속에서 인간의 공존과 상생의 원리가 생겨난다. 항상 반듯한 질서 속에서 감정 표현의 출구가 막혀있다면 공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카니발이 추구하는 정화는 진정한 공존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상생을 목표로 한다. 소란스럽고 떠들썩한 소음으로 가득 찬, 떼로 몰려다니는 카니발은 몸과 몸의 부딪힘, 몸들의 대화가 된다. 구석에 틀어박혀 독백을 내뱉으며 붉게 충혈된 분노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고받기가 이루어지도록 밥상을 차려놓은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배출의 의미를 지닌 카니발 형식의 사회적 배출 행위는 현재에도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브라질의 삼바축제나 안동의 하회탈춤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안동의 전통적 탈춤인 하회별신굿탈놀이(하회탈춤)도 비워내는 축제다. 하회탈춤은 피지배계급인 상민(常民)들에 의해 연행되어 온 탈놀이다. 이 탈춤은 원래 디오니소스 축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마을굿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정화의 관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하회탈춤이 지배층의 놀이가 아닌 피지배층의 놀이라는 사실이다. 여섯 마당 가운데, 주지마당에서는 다산과 풍농을 기원하고, 백정마당에서는 성을 풍자하며 지배층의 권위 의식을 꼬집고, 할미마당에서는 여성의 삶의 애환을 풍자하며 가부장적인 권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파계승마당에서는 승려의 타락상을 비웃고, 양반선비마당에서는 허울 좋고 위세 좋은 양반과 선비를 통하여 상민들의 억눌린 감정과 불만을 마음껏 풍자한다. 한 마디로 하회탈춤은 다산과 풍농을 기원하는 동시에 피지배층이 주체가 되어 지배층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회마을의 양반들이 탈춤을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은 어인 일일까. 아마도 지배층은 그날만큼이라도 상민의 쌓인 감정을 마음껏 해소하라고 배려한 것은 아닐까. 그것도 직접적으로 면전에 삿대질하는 것도 아니고 은유적 형식으로 자신들을 조롱하는 탈놀이야말로 기꺼이 눈감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배출구인 탈춤은 계급 간의 공존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하회탈춤이나 디오니소스 축제는 상생을 위한 집단의 배설 놀이가 된다. 봉건사회에서 피지배층인 민중들의 봉기는 억눌린 울분이 집단적 분노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극단적인 형태다.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러시아 혁명이나 중국 혁명이 그랬다. 조선에서도 억압된 피지배층의 울분이 끝없이 팽창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민란이 일어났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배층은 하회탈춤과 같은 극적 이벤트를 마련하여 상인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하려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선후배 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는 야자 타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일정한 시간 동안에 후배가 선배가 되고 선배가 후배가 되어, 후배가 선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야자 타임은 일종의 배설 시간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개인의 정화작용에 관심을 가졌다면, 디오니소스 축제나 하회탈춤 놀이는 집단적 정화작용이다. 비움 또는 배설은 정화를 목적으로 한다. 카타르시스는 불만이 완전히 해소되었을 때, 분노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사라졌을 때, 욕망이 깨끗이 비워졌을 때 가능하다. 스스로 깨끗하게 정화되었다는 느낌, 어떠한 부정적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순수해진 영역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원할해지고 결국 진한 행복감이 밀려올 것이다.


예술은 비움(배출)의 행위다

예술가들은 자기표현의 대가들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노래를 열창하는 행위는 자기를 표현하는 행위다. 화가는 머릿속에서 엮어낸 이미지를 붓으로 화폭에 형태화시킨다. 화가의 붓놀림은 자기 표현행위가 된다. 그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은 화가의 정체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는 피카소가 생각하는 전쟁의 비극, 조국에 대한 사랑이 집약적으로 들어있다. 넓지 않은 화폭에 화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어 장문의 연설보다도 훨씬 구체화시키는 화가야말로 자기표현의 귀재다. 그림이나 음악 등의 예술은 날숨의 결과처럼 그의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기(운)의 종합체이다. 호흡에서 공기를 안으로 들이마시는 들숨과 중립상태의 정지 그리고 몸 안의 공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들숨은 자연적 순환 상태 자체이다. 호흡의 리듬을 지각하는 예술가들은 영감을 받아 들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 후 이를 날숨으로 백 퍼센트 표출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안에 있는 쏟아 낸다는 것은 자기를 비워내는 행위다. 즉 구체적 표현행위인 예술이란 비워내는 행위인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른 예술가는 기(운)를 잃고 창백해진다. 그 창백함이란 최고조로 정화된 모습이다.


멕시코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는 그림 그리기로 비워내지 않았으면 결코 생을 유지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가 된 그녀는 십팔 세 때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척추에 철심을 박아 넣게 된다. 그 후의 삶에서 이십 세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임신 중절, 유산과 낙태, 남편과 막내 여동생의 불륜, 반복된 척추 수술, 다리 절단 등 육체와 정신의 상흔은 보통의 심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연약한 체구의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칼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그림을 통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고통이나 울분을 삭이지 않고 붓질이라는 움직임을 통해 화폭에 이미지를 구체화하면서 자신을 드러냈다. 고통의 출구인 그림 그리기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여주인공 존시에게 주어진 하나의 잎새처럼 생명의 열쇠였다. 미술에 칼로가 있다면 음악에는 에디트 피아프가 있다.

프랑스 태생의 불멸의 샹송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다.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버려진 조그만 체구의 피아프는 열다섯의 나이에 거리의 가수가 되었다. 흔히 피아프 하면 스캔들, 파경, 교통사고, 알코올과 마약중독 등을 떠올린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고단했고 외로웠으며 사랑에 목말라했다. 그중 권투 세계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과의 비극적인 사랑은 유명하다. 뉴욕에 머물고 있던 세르당은 피아프의 요청에 따라 서둘러 프랑스행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소식을 접한 피아프는 사흘이나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한다. 사흘 후 사람들 앞에 나타난 그녀는 삭발한 상태였고 손에는 악보가 쥐어져 있었다. 가슴 저미는 극한 슬픔을 삭발로 표현한 피아프는, 그 사이 방안에 틀어박혀 저 유명한 샹송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완성했다. “푸른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진다 해도”로 시작되는 위대하고 슬픈 노래는 예술가의 눈물을 머금고 태어났다. ‘사랑의 찬가’는 세르당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이자 피아프 자신의 슬픔을 승화시킨 노래다. 가슴 호흡이 아닌 깊고 깊은 복식호흡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었던 피아프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의 정서를 가슴에 담아두기보다는 노래로 배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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